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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서울권

(2016-004) 청계산 셰르파 우정 산행

by 풍경감각 2016. 2. 13.

 

(2016-004) 청계산 셰르파 우정 산행


새로 영입한 청계산 마스코트와

그리고 나눔셰르파와 함께...


♡ 일시 : 2016.2.13(토)

♡ 누구랑 : 블랙야크 마운틴,바이크,역사,나눔 청년셰르파 및 도전자와 함께

♡ 코스 : 원터골>매바위>매봉>원점회귀

(어린이 동반 및 날씨관계로 혈읍재>만경대>석기봉>이수봉>국사봉은 마음속으로 산행)

 

블랙야크 4기 셰르파 우정산행 2탄...

 

지난번 관악산 산행에 이어 청계산에서 다양한 전문분야의 셰르파님들과 함께 우정산행을 다녀왔습니다.

눈감고 청계산을 다니면서도 산과 지명의 유래, 산봉우리와 관련된 이야기들을 잘 모르는 분들이 의외로 많더군요.

원터골,옥녀봉,혈읍재,망경대,이수봉,국사봉 등등....

고려시대 유신 조견과 목은 이색, 조선시대 성리학자 정여창, 추사 김정희 선생등이 은거하고 머물렀던 청계산...

때마침 역사탐방 전종현세르파님의 즉석해설로 원터골과 미륵당을 알아보기도 했답니다.

 

<청계산 마스코트와 함께 오른 셰르파 일동>

 

 

 

<청계산 유래>

 

청계산이라는 이름은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맑아 '청계(淸溪)'라는 이름으로 불렀으며

 조선시대에 푸른색 용이 승천하였다는 전설을 두고 과천읍지에는 '청룡산(靑龍山)'이라고도 불렀다는 기록이 있는데

과천시지와 과천문화원 자료를 참조하여 좀더 자세히 알아보자.

 

'청계산((淸溪山)'의 이름은 지금은 사라진 '막계리' 에서 비롯되었다.

 '맑은 물이 흐르는 개울, 또는 시내' 라는 뜻의 '막개'가 한자로 '청계(淸溪)'가 된것이다.

청계산 아래 자리 잡았던 막계리는 1970년대 초반만 해도 초가집이 많은 농촌지역으로 '막계1~3리'로 불렸는데

현재 서울대공원 내 동물원과 식물원이 자리한 곳이 막계1리, 서울랜드가 있는 곳이 막계2리였다.

그러나 1977년 서울대공원 지역으로 고시돼 마을은 없어지고, 막계동이라는 이름만 남았다.

당시 막계리는 농사를 짓거나 신흥종교 주민들이 대부분이었고 문원마을 이주택지로 철거를 반대했으나

지금은 호화주택과 편의시설들이 들어섰으니 격세지감이라고나 해야 할까 씁쓸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청룡산(靑龍山)'의 유래는 '여지도서'와 '광주부산천조'에 청계산이 기록되어 있고 '중정남한지'에

 '청계산은 의곡면(현 의왕시)에 있으며 북쪽은 과천과의 경계로 일명 청룡산(靑龍山)이다. 고려 때 조견(趙猏)의 망경대가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과천 관아의 진산을 관악산으로 볼 때 과천관아의 좌측에 해당하는 산이기 때문에 풍수지리상 '좌청룡'으로 불렀고

오른편 수리산이 '백호산(白虎山)'으로 불렸던 데서 연유한다고 한다.

 

 

몇년전에는 강남과 가깝고 이효리 등 유명 연예인들이 다이어트를 하기 위하여 자주 등산을 한다는 입소문이 퍼져

 10대,20대의 젊은 친구들이 많이 찾아왔으며 실제로 계단길을 효리코스라고도 부르기도 한다

지금도 원터골 갈림길에서 매바위로 올라가는 나무계단에는 기증한 개인들의 이름을 붙여서 관리하고 있는것을 볼수 있다

 

 

개인적으로 신분당선이 개통되기전에는 옛골이나 원터골에서 양재로 나오는길이 너무 막혀 여러번 걸어온적도 있었고

광청종주의 마지막구간으로 하오고개를 가로질러 안양공동묘지길로 올라와 양재동 화물터미널까지 배가고파 힘들게 걸어보기도 하였다.

 

 대모산에서 개나리골로 올라가 국사봉을 찍고 옛골로 하산하여 인능산으로 달리는 트레일런 코스의 일부이기도 하고

따뜻한 봄날 과천매봉에서 청계사에 들러 와불을 참배하고 꽃가마를 구경하던 기억도 많은 산중의 하나이다.

 

 

<나눔셰르파의 풋풋함과 여유>



<다둥이 아빠는 사랑을 짊어지고...>




 

<청계골 갈림길 헬기장>

 

 

 

<돌문바위>

 

청계산의 정기를 듬뿍 받아 가세요...

매바위에서 매봉으로 오르는 길에 있는 ‘사람 人’ 모양의 바위로 한사람이 겨우 통과할수 있다.

세바퀴를 돌면 아들을 낳을수 있고 다섯바퀴를 돌면 소원이 이루어지고 더 돌면 돌이 된다는 우스개소리를 하는곳으로

 가끔 스님이 나와서 목탁을 두드리며 시주를 받기도 한다

 

 

 <총혼비>


매봉 약 50m아래 표지석을 따라가다 보면 우측으로 '안되면 되게 하라'는 특전대원의 충혼비가 있다.

1982년 6월1일 특전대원들이 타고가던 수송기가 이곳에서 추락하여 전원 사망한 안타까운 곳이기도 하다

 

 


<매바위>


사실 매봉보다 서울시내를 조망하기에 더 좋은 장소이다

 

 

 

 

<매봉 정상 모습>

 

가끔 매바위나 과천매봉을 배경으로 인증을 올리는 경우가 있는데 이곳 '매봉'이 청계산 정상 인증지점이다.

이곳에서 직진하면 '혈읍재'와 '만경대'를 거쳐 '마왕샘'과 '석기봉' 암릉을 타고 절고개를 지나 '이수봉'과 '국사봉'으로 갈수 있고

왼쪽 계곡으로 내려가면 청계골과 옛골로 이어지고 우측 절고개 방향으로 내려가면 청계사와 과천서울대공원으로 하산할 수 있다


청계산은 고려 충신 조윤이나 정여창 선생의 일화에서 보듯 충신과 대학자가 머물렀던 ‘은둔과 지조의 땅’이기도 했다.


청계산에는 '망경대'에서 개경을 바라보았다는 고려 유신 조견과 

고려 말 문신 송산(松山) 조윤(趙胤·1351~1425)은 조선 초 이태조가 벼슬을 내렸지만 끝내 사양하고 청계산으로 숨었다. 그는 청계산의 제 1봉인 망경대(望京臺)에 자주 올라 옛 도읍 개경(開京·개성)을 바라보며 슬피 울다가 그 아래 마왕굴 샘물로 갈증을 풀었다고 한다. 원래는 ‘萬景臺’였으나 이후 지금의 이름을 갖게 됐다는 것이다.

또 고려 말 삼은(三隱) 중 한 명인 목은(牧隱) 이색(李穡·1328~1396)과 변계량(卞季良·1369~1430)도 이 산에서 은거했다고 전한다.

청계산의 국사봉(國思峰·542m) 역시 이들이 고려를 사모해 붙여진 이름이다. 우리나라에 국사봉이란 이름의 봉우리가 많은데, 거의 대부분 나라를 대표하는 스님을 일컫는 국사(國師)를 쓰는 것과 다르다.


조선전기 성리학자 정여창이 성리학적 이상 국가 실현이 좌절되자 마왕샘으로 알려진'금정수(金井水)'에 은거하기 위하여 이 고개를 넘다 통분해 울었는데

 그 피울음 소리가 산 멀리까지 들렸다 하여 후학인 정구(鄭逑)가 '혈읍(血泣)재'라 명명했다고 한다

연산군의 무오사화에 연루됐으나 청계산 하늘샘에 은거하면서 정여창(鄭汝昌·1450~1504)이 두 번이나 목숨을 건졌다고 하는데

 이수봉(貳壽峰·545m)은 두 번 목숨을 건졌다 해서 후학인 정구(鄭逑)가 붙였다는 지명이다.

정여창 선생은 1498년 무오사화로 함경북도 종성에 유배되어, 1504년(연산 10년)에 사사되었다.

그 해에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시신이 찢기는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했다

경상남도 함양에는 정여창 고택이 있다


일두(一蠹) 정여창[ 鄭汝昌 ] 1450년(세종 32) ~ 1504년(연산군 10)

정여창(鄭汝昌, 1450~1504)은 조선 성종 때의 대학자로 본관은 경남 하동이나 그의 증조인 정지의가 처가의 고향인 함양에 와서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함양사람이 되었다. 자녀 균분 상속제가 지켜지던 당시에는 거주지를 옮길 때 처가나 외가로 옮겨가는 것이 그리 드문 일은 아니었다.

8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혼자서 독서하다가 김굉필과 함께 함양군수로 있던 김종직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구하였다. 여러 차례 천거되어 벼슬을 내렸지만 매번 사양하다가 성종 21년(1490) 과거에 급제하여 당시 동궁이었던 연산군을 보필하였지만 강직한 성품 때문에 연산군의 총애를 받지 못했다. 연산군 1년(1495) 안음현감에 임명되어 일을 처리함에 공정하였으므로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1498년 무오사화 때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 1504년 죽은 뒤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되었다.

그의 어릴 때 이름은 백욱(佰勖)이었는데, 그의 아버지와 함께 중국의 사신과 만나는 자리에서 그를 눈여겨본 중국 사신이 “커서 집을 크게 번창하게 할 것이니 이름을 여창(汝昌)이라 하라”고 했다고 한다. 과연 그의 학덕은 출중하여, 우리나라 성리학사에서 김굉필·조광조·이언적·이황과 함께 5현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리고 추사 김정희가 제주에서 9년, 함경 북청에서 1년여의 유배를 다녀온 후 

말년 4년간을 옥녀봉 아래 돌무께마을 과지초당에서 생활하였다는 이야기 등이 전해온다



 

 


<청계산의 또 다른 과천 매봉>


이곳은 과천문원리 방향에 있으며 정상이 아니다 (창고사진)

 

 

<하산길>



  

 <원터골과 미륵당>









 <청계산과 보리밥>



 


<여러분~~~수고 하셨습니다>





 

<맺는말>


청계산은 작지만 물이 맑고 약수가 많은 산이다.

역사적으로 많은 충신들과 대학자들이 은둔하고 심지어 역모를 꾀하던 도적들도 자주 숨어들었다고 한다.

아마도 궁궐과 조금이라도 가까우면서도 골이 깊고 숙소인 원터와 말죽거리 등 역참이 있어 그러하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심지어 몇년전에는 과천서울대공원 말레이곰까지 청계산을 오르고 싶어 뛰쳐나왔으니 명산은 명산인가 보다...ㅎㅎ

지금도 국사봉 가는길에 꿀과 막걸리로 유인하여 포확한 장소에는 이곳에서 잡았다는 표시가 되어 있다


예로부터 과천은 나무꾼으로 유명하였다고 한다

청계산의 땔나무가 화력이 좋았기 때문에 과천의 나무꾼은 불과 40여년전까지도

멀리 동대문시장에까지 나가서 땔나무를 팔았다고 한다.


지금도 수림이 울창하고 도심 가까이 있어 남녀노소 누구나 쉬엄쉬엄 오를수 있는 친근한 산으로 여전하니

이또한 얼마나 소중하고 행복한 일인가...

 

이렇게 좋은사람 황병준 셰르파님 등에 업혀서 정상에 오른 귀염둥이 아이까지 즐거워하면서 배꼽인사를 하니

아마도 올해는 청계산을 찾는 모든 산객들에게 행복한 일들이 가득하리라 생각해본다.


2016.2.13(토). 청계산에서 풍경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