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등산/경기권

하남 검단산(657m) 정상석 방향이 바뀌다

by 풍경감각 2017. 11. 13.

하남 검단산(657m) 정상석 방향이 바뀌다

 

오랜만에 전직장 동료들과 산(山)사부님을 모시고 검단산에 올랐습니다.

 잠실에서 30-5번 버스를 타면 애니메이션 고등학교까지 한번에 갈수 있으므로 자주 찾던곳인데 정말 오랜만에 간것 같습니다

 

검단산의 유래는 백제시대 인도승려 마라난타(검단선사)가 은거하며 수행했다는설과 전국의 조운을 검사하던 길목이라는 설이 있지만,

BC14년 백제가 하북위례성에서 하남위례성으로 도읍지를 옮긴 후 왕들이 숭산인 검단산에서 천신 즉 동명(東明)에게 제사를 올리던

 신성한 산(신성한 제단이 있는 산)이란 뜻은 확실한것 같습니다. 물론 헬기장 공사로 제단은 없어졌지만...ㅠㅠ 

 

하남과 남한산성 둘레 그리고 한강 하류 김포 등 옛 백제의 지역에 검단산이란 이름의 산들이 지금도 있는 것으로 보아,

 동서남북에 백제의 시조신 동명에게 제사를 올리던 산이름이 검단산임을 알 수 있습니다.

현재 우리 고어를 연구하는 국어학자들 사이에선 '검(단군왕검, 검단산)', '곰(곰나루)', '감(감악산)'의 낱말은

 '신성하다'는 뜻으로 풀이하고 있습니다.

 

 이곳 미사리 한강유역은 백제시대 최고 미인으로 알려진 지극정성 남편사랑 도미부인의 설화가 전해져오고 있으며,

 두물머리부터 이곳까지 물살이 쎄서 당시 조운을 운반하던 배의 안전을 기도하던 여덟개의 당집이 있었다고 하여 팔당이라는 지명이 생겼지요

 

배알미동 지명유래도 특이한데 관리가 낙향을 하거나 귀향을 갈때 한양을 향해 임금님에게 마지막 인사를 올렸다고 하여

 배알미동으로 불리는데 단종이 영월로 귀향을 갈때도 이곳 백사장에 제물을 차려놓고 마지막 인사를 올렸다고 합니다.

 

또 조선시대 원주의 흥원창(세곡미를 보관하던 조운창고)과 충주의 가흥창에서 실은 세곡미가

 두물머리를 통해 팔당으로 들어와 한강 삼개나루(마포)에 닿기 전 일부를 도미나루에서 내려 상사창과 하사창으로 옮겼다가,

등짐으로 남한산성 북문을 통해 남한산성 내로 옮겼다는 기록이 있습니다(병란 대비 남한산성 비축미).

 

객산 아래 골말은 조선시대 창우포와 둔지포에서 운반된 소금과 쌀을 보관하던 창고가 있어 하사창동과 상사창동이라는 이름이 지금도 있고.

 병자호란때 북문을 나섰다가 청군에게 대패한 법화골 전투가 벌어진 남한산성으로 이어지는 들머리가 되는곳이기도 하지요

 

 

검단산에는 구한말 최초 국비유학생으로 '서유견문'을 쓴 유길준 묘소가 있고, 오름길 중간에 노송을 배경으로

 한강과 건너편 예봉산을 조망할수 있는 전망대가 여러곳 있어 쉬어가기에 아주 좋은곳이기도 합니다

 

준족들은 정상에서 고추봉과 용마산을 거쳐 은고개와 벌봉을 타고 남한산성으로 산행을 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곱돌 약수터를 지나 낙엽송 군락지에서 쉬었다가 원점으로 하산을 하게 됩니다

 

뒷동산처럼 오르내렸던 검단산 정상에서 바라본 예봉산과 운길산 그리고 남한산성 산그리메를 바라보며

 가을의 끝자락을 이렇게 잡아보았네요

 

곧 첫눈이 오겠지요

 

2017.11.12(일) 풍경소리

 

하남 애니메이션고등학교입니다

 

베트남참전비와 화장실이 있는 건물을 지나면 걷기 좋은 산길이 이어자고

다소 가파른 오르막길을 올라가면서 땀을 흘릴만 하면  유길준묘소가 보입니

 

 

구당 유길준은 한국 최초 미국 국비 유학생으로 서유견문을 쓰고 커피라는 단어도 사용하지만

갑신정변의 주모자인 김옥균,박영효등과 친분관계가 있다고 하여 체포되기도 하지요

 

개화운동을 전개하며 갑오개혁의 기초를 제공했으나 청일전쟁 당시 수립된 친일내각에 참여하고

 아관파천으로 친일내각이 붕괴되고 친러시아 내각이 수립되자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고종이 폐위된뒤 귀국을 하지요 

 

 

배알미동 방향에서 올라오면 이곳에서 만나게 됩니다

하남 창우동 도미나루 옆 배알머리(배알미에서 바로 올라오면 운동기구가 있는 이곳에서 만나게 됩니다

학자들마다 다른 주장인데, 백제 하남위례성 시절 온조왕부터 백제의 왕들이 검단산의 동명묘(東明廟, 동명사당)에 배례하던 곳

 또 광나루를 건너 지방을 오가던 관리들이 이곳에서 한양 땅 임금을 향해 배례하던 곳,

 단종이 영월로 유배갈 때 광진교 북단 광나루에서 배를 타고 원주로 향했는데

그 때 백성들이 나와 단종을 울면서 배알하던 곳이란 설 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명을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선 ‘배알’은 ‘비탈’의 사투리인 ‘비알’에서 변한 말이고,

 ‘미’는 산을 뜻하는 ‘뫼’ 또는 들을 뜻하는 ‘미’에서 변한 말이라고 주장합니다.

이곳의 지형을 볼 때 검단산 북쪽 기슭이니 ‘비알뫼’ 즉 ‘비탈뫼’ 즉 ‘비탈이 심한 산기슭’이란 뜻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현 지명을 갖고 그 이름유래를 알아낸다는 건 고어(古語) 공부부터 시작해 참 어려운 작업입니다.

 

 

가파른 계단길을 올라가면 전망대가 나오는데 운길산 예봉산과 검단산 사이, 좁은 협곡을 흐르는 강물이 보입니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두물머리에서 만나 좁은 협곡(팔당)을 지나 한강 본류에 접어들게 됩니다.

옛날엔 한강 팔당 쪽 강을 '두미강' 혹은 '도미강'이라고 불렀습니다.

'두미'란 '큰 강의 끝(두물머리에서 합쳐진 강물의 끝부분)'이란 뜻인데,

백제 4대 왕인 개루왕과 도미부인의 전설이 바로 이곳에서 펼쳐집니다

 

팔당(八堂)의 이름유래론,

1 강 양쪽 산세가 험준하고 수려해 하늘에서 8선녀가 내려와 놀던 여덟 곳에 먼 훗날 8개의 당을 지었다는 전설,

2 삼국시대부터 세곡선이 오가던 이곳은 갑자기 좁아진 지형 탓에 물살이 휘돌고 유속이 빨라져 배가 전복하는 사고가 빈번하자

 뱃사람들의 안전한 통행을 기원하고자 강변에 8개의 당집을 세워 팔당이라 불렀다는 설,

3 넓은 나루란 의미로 바다나루〉바다이〉바당이〉바댕이〉팔당(일제시대)으로 음운변화가 일어났다는 설 등이 존재합니다.

제 생각으론 1번은 그야 말로 전설이고, 2번과 3번 모두 맞다는 생각입니다. 고유한 우리말 이름이 있었을 것이고

 한자로 표기하다보니 변화됐을 것이란 추측입니다.

또 백제 하남위례성 시절부터 세곡미를 실은 조운선들이 이곳을 드나들었으니,

당연 배들의 안전운항을 기원하는 당집들이 여러 곳 있었다는 판단입니다.

 백제시대 도미나루에 부린 세곡미들을 창고(현 하사창동과 상사창동)로 옮겼다는 기록들이 삼국사기에도 등장합니다.

 

바로 건너편에 있는 운길산과 예봉산이 보입니다.

 운길산은 조곡산이나 초동산(草洞山), 수종산으로 불렸습니다(신증동국문헌비고).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엔 운길산과

 조곡산이 함께 등장하는데, 현재의 운길산은 조곡산(早谷山)으로 지금의 적갑산 철문봉 예봉산 줄기는 운길산(雲吉山)으로 기록됩니다.

그러나 예봉산의 이름은 없고, 예빈산은 지금의 위치에 정확히 그려져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 지리지에도 조곡산(早谷山)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조곡'이란 두산 사이 '좁은 계곡'이란 뜻입니다(조여울 참조).

한강 두물머리를 향해 입질하는 물고기 머리 형국이란 운길산(雲吉山, 610m), '구름이 가다가 산에 걸려 멈췄다'

 또 '태조 이성계가 산에 구름이 많다'고 해서 운길산이 됐다는 이름유래는 믿을 수 없습니다.

 

 

 

 

남양주와 양평사람들은 깊은 산 속을 거칠게 휘감고 올라 온 차가운 북한강을 웅수(雄水, 숫물)라 했고,

비교적 부드럽고 따뜻한 남한강을 자수(雌水, 암물)이라고 합니다. 또 북한강을 '용진강', 남한강은 '월계강'이라고도 불렀습니다.

 

현재의 예봉산과 운길산을 옛날엔 운길산과 조곡산으로 부른 듯하고,

 예빈산은 일제시대에 들어 예빈산의 '예'와 봉안마을의 '봉' 자를 따다가 예봉산으로 바꿉니다.

운길산과 예봉산은 다산 정약용의 형제들의 여름 독서실로도 사용됩니다.

 특히 여름날 수종사에서 다산 정약용의 형제가 글을 읽었다는 기록이 많습니다.

 다산의 시 중엔 14세에 지은 '수종사에서 노닐며'라는 글도 있습니다.

 

정약용의 고향 마재마을에서 보면 동쪽으로 두물머리(북한강과 남한강 합수부)가 보입니다.

두물머리는 여러 곳에서 모인 물산이 한양으로 가는 도중 들르는 중간 기착지로

 예부터 장사치와 뱃사공, 어부, 뗏목꾼 등 뜨내기들만 가득했던 인심이 고약한 곳입니다.

 

정약용 역시 고향 마재마을을 평하길 "주민들 대다수가 상인과 어부들로 구성되어 인심이 사납다"고 했습니다.

 옛기록을 보면 대개 나루를 일컬어 '삼무사유촌(三無四有村, 양반 처녀 의원은 없고, 무당 뱃놈 즘놈 봇놈만이 있는 곳)'이라고 불렀습니다.

 즘놈은 도공이며(항아리 장사치, 옹기장수), 봇놈은 보자기에 물건을 싸가지고 다니면서 파는 장사꾼(보따리 장사, 장돌뱅이)입니다.

 그만큼 정착민보다 떠도는 사람들이 많이 살았던 곳입니다.

 

검단상 정상에 오른 동료들입니다

 

 

원래 서 있던 검단산 정상석 위치입니다

 

 

검단산 정상에서 내려오면 만나는 억새지대입니다

 

이곳 갈림길에서 직진하면 고추봉과 용마산으로 이어지고 곱돌약수터 방향은 우측으로 가파른 돌길을 내려가야 합니다

 

정자와 산불감시소가 있는 헬기장입니다

 

 

 

곱돌약수터입니다

 

 

곱돌약수터에서 바라본 하남 시가지입니다

 

검단산 낙엽송 지대에서 카메라 목운동을 시켜봅니다^^...ㅎㅎ

 

 

 

 

 

호국사라는 절이 있는 갈림길입니다

 

하산길 사부자집으로 가는길에 만난 마지막 단풍이네요

 

 

 

 

검단산...

오랜만에 산길을 걷고 단풍을 배웅하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상기내용은 작년 8월 팔당 낭만길과 다산 유적지를 찾아서라는 제목으로 진행한 역사문화탐방 해설글을 일부 참조하였습니다

 

2017.11.13. 풍경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