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0주년 기념」
태극기 휘날리며 역사문화 탐방 경복궁(景福宮), 옛 이야기 속으로...
경회루에서 건청궁까지 (2편)
이미 술에 취하고 덕에 배부르니 군자는 만년토록 그대의 큰 복을 누리리...
(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
경복궁 이름은 태조의 명을 받은 정도전이 시경(詩經)의 대아(大雅)의 기취(旣醉, 이미 취하다)에 나오는 시구에서 따온 이름으로 '큰 복을 누리며 번성하라'는 뜻이다
♡ 경회루
경복궁 근정전 서북쪽 연못 안에 세운 경회루(慶會樓, 국보 제224호)는 나라에 경사가 있거나 사신이 왔을 때 연회를 베풀던 곳으로 일종의 영빈관이다
'경회(慶會)'는 '임금과 신하가 덕(德)으로서 만난다'는 뜻이라도 합니다
물을 다스리는 '용 두마리'와 '인왕산 치마바위'에 얽힌 이야기가 전해져 오는 곳이기도 하지요
♡ 경회루 연못의 두마리 용....
경회루는 불을 억제하기 위하여 주역의 원리에 따라 지어졌다고 하며 연못에 화재를 방지하기 위해 청동으로 만든 용 두 마리를 넣었다고 한다.
1997년 11월 경복궁 경회루 연못 준설작업 도중에 출토된 유물로 경회루 북쪽 하향정 (荷香亭) 앞 연못 바닥에서 발견되었다
그러면 나머지 한마리 용은 승천한것일까?...아니면 누가훔쳐 갔을까?...
출퇴딘 용은 국립고궁박물관에 전시 중인데 제가 사진으로 찍어 왔습니다
▽ 하향정(荷香亭)
이승만 대통령이 여기서 낚시를 하다가 6.25 전쟁 소식을 들었다고 하지요..
이제 교태전과 아미동산으로 이동합니다
♡ 교태전
강녕전을 지나 양의문(兩儀門)을 들어서면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交泰殿)이 나타나고
뒤쪽으로는 중국에서 가장 아름답고 신비롭다는 산의 이름을 빌어“아미산”이라고 한은 정원이 있지요
는데 양의(兩儀)'와 '교태(交泰)'는 음양의 조화와 남녀의 교합(交合)을 의미하며 음양이 잘 조화를 이루어
순조로운 생산(生産)이 되기를 기원하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고 합니다
특히 '태(泰)'는 <주역(周易)>의 64괘(掛) 중에서 하늘, 남자, 상승(上昇)을 의미하는 건(乾)괘 셋이 아래에 있고 땅, 여자, 하강(下降)을 의미하는 곤(坤)괘 셋이 위에 있는 모양으로, 앞으로 땅의 기운이 하강하고 하늘의 기운이 상승하여 비로소 천지음양의 기운이 화합하여 만물이 생성, 번영한다는 것을 뜻한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오고 천둥치는 날을 피하여 택일하다 보니 원자 생산이 잘 안되었지요...ㅎㅎ
여자들의 공간이라서 각종 문은 쉽게 열수 있도록 '들어열어창'으로 만들었고 출입문도 비교적 가볍게 만들었지요
이 부분을 용마루라고 하는데 왕과 왕비는 곧 용을 상징하는지라 건물에 따로 용을 얹을 필요가 없어서 그렇다고 하는데...
밤 늦게까지 야근을 한 신하가 깜깜한 밤에 구중궁궐에서 길을 잘 못 들어 혹시나 침전으로 들어올까봐 구분이 쉽게 용마루를 없앴다는 이야기도 들었네요...ㅎㅎ
교태전 꽃담을 지나 이미동산으로 가는 문입니다
▽ 아미산(峨嵋山) 정원과 굴뚝
경회루의 연못을 만들면서 퍼낸 흙을 모아 네개의 꽃계단으로 축조한것으로 붉은 굴뚝과 함께 사시사철 아름다운 모습을 이루며 중국의 아미동산에서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경복궁 아미산 굴뚝은 왕비의 생활공간인 교태전 온돌방 밑을 통과하여 연기가 나가는 굴뚝으로 현재 4개의 굴뚝이 서 있는데 6각형으로 된 굴뚝 벽에는
당초무늬, 학, 박쥐, 봉황, 소나무, 매화, 대나무, 국화, 불로초, 바위, 새, 사슴, 나비, 해태, 불가사리 등의 무늬를 조화 있게 배치하였고
십장생, 사군자와 장수, 부귀를 상징하는 무늬, 화마와 악귀를 막는 상서로운 짐승들이 표현되어 있다
왕의 침전(寢殿)인 강녕전(康寧殿)에 대해 왕비의 침전으로 지었으므로, 궁궐 안에 있었던 150여 채의 건물 가운데 가장 화려하게 치장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뒤뜰에 있는 아미산(峨嵋山) 위에 아름다운 꽃무늬를 새긴 굴뚝이 남아 있어(경복궁아미산의 굴뚝, 보물 제811호), 왕비의 주택이 지녔던 높은 품격의 일면을 아낌없이 보여주고 있다.
굴뚝의 위쪽 부분은 목조건물의 형태를 모방하였고 그 위로 연기가 빠지는 작은 창을 설치하였다. 굴뚝의 기능을 충실히 하면서 각종 문양 형태와 그 구성이 매우 아름다워 궁궐 후원 장식 조형물로서 훌륭한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
♡ 자경전
고종이 당시 왕실의 최고 어른인 조대비를 위해 옛 자미당터에 지은 건물로, 여성을 위한 공간답게 건물 곳곳에서 은근하면서도 화려한 장식을 볼 수 있다.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다시 지으면서 교태전 동쪽 자미당터에 조대비(신정익왕후)를 위하여 자경전을 지었으나 불에 타버려 고종 25년(1888)에 다시 지었다. 경복궁 내의 일상생활하는 침전 건물로는 유일하게 남은 것이다. 자경전은 44칸으로서 겨울에 따뜻하게 지낼 수 있도록 서북향에 복안당이라는 이름의 침실을 두었고 중앙에는 낮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자경전을 두었다. 동남향에는 다락집 청연루를 두어 여름을 시원하게 보낼 수 있도록 하였으며 여기에 12칸의 협경당이 붙어 있다. 주변에는 수십 칸의 행각과 담장·문들이 있었으나 대부분 없어졌다. 지금은 여러 가지 글자와 꽃·나비·대나무 형태를 흙으로 구워 새겨넣은 아름다운 꽃담과 오래 사는 열 가지의 동식물 무늬[십장생]를 조화 있게 새겨넣은 집 모양의 굴뚝이 남아 있다
자경전은 경복궁의 침전이며 대왕대비가 거처하였던 대비전이다.
1865년 고종 때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재건하면서 건립되었다.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888년(고종 25년)에 중건되었다. 이 곳은 익종(翼宗:追尊王)의 비이며 고종의 양모가 된 신정왕후(神貞王后)가 거처하던 곳이다. 자경전(慈慶殿)이라는 명칭은 1777년 정조가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를 위해 창덕궁에 자경당(慈慶堂)을 건립하면서 유래된 것이다. 헌종(憲宗)의 생모로 철종이 죽은 뒤 고종에게 대통을 잇게 하고 흥선대원군의 집권을 가능하게 하여, 조대비(趙大妃)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진 신정왕후를 위하여 지은 것이다.
자경전과 여기에 붙어 있는 청연루(淸燕樓)와 협경당(協慶堂), 그리고 자경전 뒷편으로 복안당, 맞은편의 만세문, 행각(行閣)으로 구성되어 있다. 자경전 좌측 담장은 꽃담으로 장식하였고 뒷마당에는 십장생이 새겨진 굴뚝이 유명하다. 자경전은 정면 10칸, 측면 4칸, 단층팔작 기와지붕, 익공(翼工)집. 장대석 댓돌 위에 사다리꼴의 높은 초석을 놓고 모기둥[方柱]을 세워서, 2익공(二翼工)의 공포를 짜고 겹처마를 들인 소박한 건물이다. 청연루는 사각형 석주를 세우고 누마루를 깐 팔작집이다. 협경당은 정면 중앙 3칸 · 상단석(上端石) 위에 모기둥을 세우고 2익공의 공포를 짰다. 만세문은 일각문으로, 2칸 판문을 달았다. 행각은 무익공(無翼工)에 3량가구(三樑架構)의 홑처마를 들였다.
1985년 1월 8일 보물 제809호로 지정되었다
▽ 자경전의 꽃담입니다
▽'조대비'를 위한 자경전(慈慶殿)
경복궁에서 중건 당시 그 모습대로 남아있는 유일한 건물로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고종의 양어머니가 된 '조대비'를 위해 특별히 지은 것입니다
정문을 만세문(萬歲門)으로 이름짓고 담장은 아름다운 꽃담으로 장식하였으며 뒤뜰에는 불로장생을 기원하는 '십장생(十長生) 굴뚝'과 불가사리와 같은 '벽사(辟邪)'를 상징하는 동물들도 벽돌로 구워 새겨 넣었습니다.
궁궐에서 자경전은 임금의 어머니 또는 할머니 등 여성들이 주거하는 공간을 일컫는데 정조(正祖)가 즉위하면서 어머니 혜경궁(惠慶宮) 홍씨를 위해 창경궁(昌慶宮)에 자경전을 짓는데서 비롯되었으며 자경(慈慶)은 임금의 어머니와 할머니 등 여자 쪽 어른들에게 경사가 있기를 바란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자경전 십장생 굴뚝
자경전 북쪽 담장을 이용해 굴뚝을 만들었는데 건강하게 오래 살라는 의미가 담긴 십장생을 굴뚝에 시겨넣어 ‘십장생 굴뚝’이라고 부르지요
굴뚝 위 일렬로 늘어선 연가가 마치 새 집 같다....
담장의 한 면을 한 단 앞으로 돌출시켜 전벽돌로 굴뚝을 만들었으며 굴뚝 벽면 중앙에 십장생 무늬를 조형전으로 만들어 배치한 사이에는 회를 발라 화면을 구성하였다. 무늬의 주제는 해 산 물 구름 바위 소나무 거북 사슴 학 불로초 포도 대나무 국화 새 연꽃 등이며 둘레에는 학 나비 불가사리 박쥐 당초무늬 등의 무늬전을 배치하였다. 해 바위 거북 등 십장생은 장수, 포도는 자손의 번성, 박쥐는 부귀, 나티 불가사리 등은 악귀를 막는 상서로운 짐승으로 상징되고 있다. 굴뚝 윗부분 역시 조형전으로 목조 건물의 형태를 모방하였고 꼭대기에는 10개의 연가를 올려놓아 연기가 빠지도록 하였다. 굴뚝의 기능을 충실히 하면서 꽃담장으로서의 조형미도 살려 조선시대 궁궐 굴뚝 중 가장 아름답다.
굴뚝 벽면에는 가운데에 커다란 조각에 건강과 장수를 기원하는 십장생 조각이 있는데
고 그 안에는 해, 산, 구름, 바위, 소나무, 대나무, 거북이, 사슴, 학, 불로초 등이 새겨져 있지요
그리고 십장생 조각 위 아래에 불가사리와 학이 새겨져 있는데 불가사리는 불을 잡아먹는다는 상상의 동물이라고 합니다
십장생 굴뚝 옆에 ‘박쥐’와 ‘당초(식물)’ 가 새겨져 있는데 옛날에는 '박쥐'가 행운을 가져다준다고 생각을 했답니다...
▽선원전 근처에서 돌발퀴즈 대항전
▽향원정과 건청궁으로...
▽'열상진원(洌上眞源)' 즉 '열천'이라는 경복궁 샘터
향원지는 모서리를 둥글게 조성한 방형의 연지에 연꽃과 수초가 자라고, 잉어 등 물고기가 살고 있으며,
수원(水源)은 북쪽 언덕 밑에 솟아나는 '열상진원(洌上眞源)'이라는 샘물입니다
맑은 샘물을 사용하고 밖으로 흘러나오는 나머지는 허드랫물로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 향원정(香遠亭)
1873년 고종이 건청궁을 지을 때 그 앞에 연못을 파서 연못 가운데에 섬을 만들고 지은 2층의 아름다운 정자입니다
향원정으로 가는 섬에는 나무로 만들어진 '취향교'라는 구름다리가 있지요
향원지의 ‘향원(香遠)’은 ‘향기가 멀리 간다’는 뜻으로 북송대 주돈이가 지은 '애련설(愛蓮說)'에서 따온 말로, 왕이나 왕족들이 휴식하고 소요하는 후원이지요
경복궁에는 연못이 둘 있는데, 하나는 강녕전과 근정전 곁에서 정면 7칸 측면 5칸의 35칸 규모의 팔작지붕 중층건물(重層建物)인 경회루(慶會樓)를 품고 있으며 다른 하나는 건청궁 앞에서 정육각형 정자로 모지붕을 한 중층건물인 향원정(香遠亭)을 거느리고 있습니다.
경회루는 웅장하며 남성적이며 향원정은 아담하며 여성적인 분위기가 풍기며 '경회(慶會)'는 '임금과 신하가 덕(德)으로서 만난다'는 뜻으로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나 외국의 사신에게 연회를 베풀던 공적인 공간이고 '향원(香遠)'은 '향원익청(香遠益淸), 즉 향기는 멀수록 더욱 맑아진다'라는 뜻으로 임금이 휴식을 취하며 거닐던 사적인 공간입니다.
경복궁의 향원정(香遠亭, 보물 제1761호)은 북쪽 후원에 있는 향원지 내의 가운데 섬 위에 건립된 육각형의 정자입니다.
향원지는 모서리를 둥글게 조성한 방형의 연지에 연꽃과 수초가 자라고, 잉어 등 물고기가 살고 있으며, 수원(水源)은 북쪽 언덕 밑에 솟아나는 '열상진원(洌上眞源)'이라는 샘물입니다. 향원정은 고종이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간섭에서 벗어나 친정 체제를 구축하면서 정치적 자립의 일환으로 건청궁을 지으면서, 그 건청궁 앞에 연못을 파서 가운데 섬을 만들고 세운 2층 정자입니다.
1867년(고종 4년)부터 1873년(고종 10년) 사이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향원정으로 가는 섬에는 나무로 만들어진 '취향교'(醉香橋, 향기에 취한다는 의미)라는 다리가 있으며, 남쪽에는 함화당, 집경당이 위치해 있습니다.
♡ 전기 발상지
에디슨 GE
건청궁 앞에는 1887,년 우리나라 최초로 전깃불을 사용하여 어두운 밤을 밝혔던 곳입니다.
미국의 에디슨이 전구를 발명했고 고종은 미국의 에디슨 전기회사(훗날 GE)에게 전기공사를 맡기게 되었고 에디슨 전기회사는 건청궁 앞에 있는 연못(향원지)의 물을 끌어들여 전기를 만드는 발전소를 지었습니다. 경복궁에 전깃불이 들어온 것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이었고 일본과 중국보다도 2년 정도 빠른 것이었어요. 이러한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한국의 전기발상지’ 글로 새긴 돌이 건청궁에 있습니다.
♡건청궁(乾淸宮)
고종 10년(1873년) 아버지인 대원군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왕과 왕비가 한가롭게 휴식을 취하면서 거처할 목적으로 지어졌다고 합니다
건청궁(乾淸宮)은 싶어 내탕금(內帑金)으로 지은 궁궐 안의 궁궐로 경복궁의 북쪽 끝에 위치합니다.
고종이 머물렀던 사랑채인 장안당(長安堂)과 명성왕후가 머물렀던 안채인 곤녕합(坤寧閤), 그리고 행랑채로 구성된 일반 사대부 집과 같이 지어졌으며, 특히 곤녕합의 옥호루(玉壺樓)에서 명성왕후가 일본 낭인들에게 시해당한 을미사변의 아픔의 현장이기도 하지요
♡ 낭인들의 이동경로를 따라 가다...
♡ 자선당(資善堂) 또는 동궁이나 춘궁....
자선당은 원래 근전정 동쪽에 있으며 왕과 왕비가 될 세자와 세자빈의 생활공간으로 '떠오르는 태양' 을 의미하는 동궁(東宮)이라 하고 춘궁(春宮)이라고도 불렀다.
세자의 궁이라는 의미로 동궁전(東宮殿)이라고도 불렀으며 이때문에 세자를 '동궁마마'라고 부르게 되었다.
'자선당(資善堂)'이라는 이름은' 자비로운 성품을 기르는 곳'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1915년 일제가 경복궁을 훼멸시킬 때 자선당의 재목들이 오쿠라(大倉)라는 일본인에게 팔려나가 일본 도쿄에서 조선관(朝鮮館)이라는 사설박물관으로 존재하다가 1923년 관동대지진 때 모두 소실되고 검게 그을린 주춧돌만 오쿠라호텔 정원에 있던 것을 1995년 경복궁으로 가져와 이렇게 놓여 있지요
왕이 되기 위한 훈련과 교육으로 세자의 하루는 시작되고 세자시강원에서 유교 공부와 틈틈이 말 타기, 활쏘기, 붓글씨 등 육예(六藝)를 연마하였다고 합니다
이제 건청궁 곤령각으로 들어갑니다
♡곤령각 옥호루
지금으로부터 두갑자 즉 120년전인 1895년 10월 8일 새벽....
일본 낭인들로부터 그 당시 명상황후는 참혹하게 시해되고 맙니다
아까 우리가 탐방했던 그 코스대로 낭인들은 총칼을 들고 광화문으로 들어와 근정전 서쪽 담장을 돌아서 경복궁 뒤편에 있는 건청궁으로 몰래 침입하게 되지요
건청궁에는 임금님이 계시던 장안당과 명성황후가 계시던 곤녕합이 있었는데 일본인들은 고종을 밀어 제끼고 곤녕합으로 가서 명성황후를 살해하고 차마 말로 표현못할 만행을 저지르고 건청궁 동쪽에 있던 언덕(녹산 鹿山)에서 시체를 태우고 재는 향원정 연못에 뿌려 버리지요
조선을 지배하고자 하는 일본 제국주의 욕망에 러시아와 친하게 지내고 군대를 신식무기로 무장시키려는 민비를 '여우사냥'이라는 작전명으로 부르고 궁궐에 침입하여 일국의 국모를 시해하죠...
1895년 10월 8일. 동이 트려면 아직 시간이 남아있었다. 칼을 찬 수상한 무리들이 경복궁의 담을 타고 넘고 있었다.이미 만취한 이 무리들은 광화문에서 총소리가 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울리는 총성. 이들을 쏜살같이 건청궁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곧바로 고종을 감금한 무리들은 살기 가득한 눈으로 명성왕후를 찾기 시작했다. 궁궐이 소란스럽자 궁내부 대신 이경직이 건청궁으로 뛰어들었다. 왕후 앞을 막아선 이경직은 그러나 순식간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왕후의 얼굴을 모르는 이 살인귀들은 닥치는 대로 사람을 베기 시작했다.결국 궁녀들에게 둘러싸여져 있던 명성왕후는 낭인들의 손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일본 낭인들은 명성왕후의 시신을 옥호루에 잠시 안치한 뒤, 증거를 없애기 위해 녹산으로 옮겨 불태웠다.명성왕후는 결국 자신과 고종이 늘 산책하던 향원정에 재로 뿌려지고 말았다.‘여우사냥’이라는 암호명으로 명명된, 국모 시해사건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일설에는 명성왕후 시해사건에 ‘여우사냥’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은, 일본에 망명해 있던 박영효로부터 비롯된다는 주장이 있다.박영효는 사건을 주도한 미우라에게 ‘민비는 한국의 큰 여우로 만사에 장애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는 설이 있다.고종은 결국 ‘아관파천’으로 건청궁을 떠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죄과를 덮으려는 듯 일제는 건청궁의 모든 건물을 헐고 새로운 건물을 지었다.광복후에 건청궁 자리는 민속박물관이 들어섰다가, 2007년 복원됐다. 파란만장한 근대사의 역사가 건청궁에 스며있다
향원정 북쪽, 경복궁 가장 깊숙한 뒤쪽에 건청궁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는 고종황제와 명성황후가 기거하던 살림공간이다..
고종은 왕의 거소인 강녕전을 놔두고 따로 건청궁을 지어 살았는데..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보면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함이였다고..
♡ 관문각지를 따라 다시 향원정으로....
'향원(香遠)'은 '향원익청(香遠益淸), 즉 향기는 멀수록 더욱 맑아진다'라는 뜻으로 임금이 휴식을 취하며 거닐던 사적인 공간이지요
지금도 진사님들의 단골 출사지로 한동안 구름다리는 미스코리아 선발대회 포토존이 되었다고도 하네요...
♡ 한복사랑과 한복열전입니다..
대한민국 국가를 상징하는 '무궁화'와 '태극기'입니다
519년의 긴 세월을 이어온 조선 왕실에는 모두 27명의 왕이 존재하였고 장엄한 궁궐에서 화려한 의복을 입고 전국 각지에서 진상한 최고급 식재료를 이용하여 차린 수라상을 받았고 아름다운 궁녀들을 곁에 두고 지냈으며 조선의 내로라하는 명의들은 궁궐에서 늘 왕의 건강을 살폈다고 한다
그러나 왕들은 이러한 호화로운 환경에서도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그다지 건강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조선 왕들의 평균 수명은 44세로 주로 눈병, 종기, 중풍 등의 병을 겪다가 승하하였고 오대산 상원사 인조 피부병과 관련된 문수동자 이야기도 생각난다
호화로운 생활과 비례하지 않았던 왕의 건강과 만기를 처리해야하는 왕의 직업병 그리고 심지어 피비린내 나는 권력다툼으로 인한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한 정치 희생양까지 있었으니 세르파님께서 말씀하셨듯이 권력과 돈에는 부모형제도 없다는 말이 실감나기도 한다
언제나 역사는 다시 돌아오는 법...
광복 70주년을 되돌아 보고 아니 명성황후가 시행된지 두갑자 즉 120년이 지난 역사와 오늘의 현실을 직시하고 100명산으로 건강도 챙기고 마음도 힐링하는 아름다운 삶이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무더위 속에서 땀 뻘뻘 흘리시면서 목이 쉬도록 해설해 주신 세르파님께 무한감사드리고
함께 하신 도전단 여러분 수고 많으셨습니다
2015.8.15.
풍경소리 이규영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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