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찾은 빛, 광복!] 민족의 아픔을 딛고...
일제강점기의 흔적과 역사의 아픔이 서려있는『정동길』을 찾아서
미리 다녀온 「덕수궁」 편을 올려 드립니다
♡ 덕수궁 사전 탐방 이야기와 사진들...
♡ 일시 : 2015.8.11(화)
♡ 8월22일 이천관세르파님과 함께 진행될 광복70주년 기념 "정동 역사 문와 탐방'을 앞두고 '덕수궁'을 다녀왔습니다
♡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펼쳐지던 수문장 교대식을 구경하고 상세한 해설은 당일 듣기로 하고 자원봉사 해설사를 잠깐 따라 다녔습니다
간단히 요약하면 경운궁의 역사와 1895년 경복궁에서 일어난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아관파천 그리고 경운궁 환궁에 이은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체결된 중명전과 1919년 고종이 함녕전에서 독살로 승하하고 덕수궁은 일제에 의해서 조직적으로 훼손되어진다는 그런 이야기였습니다. 정관헌과 후원을 한바퀴 돌아 석조전 내부를 둘러보고 국립현대미술관 별관에서 이쾌대 그림전시회를 감상한후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배재학당과 정동제일교회를 멀리서 바라보고 서울시립미술전시관까지 걸어보았습니다
▽ 대한문 앞에서 펼쳐진 수문장 교대식입니다
1906년 대안문(大安門)이 수리된 뒤 대한문(大漢門)으로 개칭하고 정문으로 삼게 됩니다
해설사 이야기로는 1970년대 태평로를 확장하면서 줄을 매달아 으쌰으쌰 당기면서 대한문이 안쪽으로 깊이 밀려 들어와 있으며
당시에 별기군 형태의 교대식이 이루어져야 한다면서 아쉬움을 나타내더군요
경복궁 수문장 교대식보다는 작고 화려하지는 않지만 외국관광객들이 가장 즐겁게 관람을 하더군요
수문을 지키던 군사들의 검술과 조선무예인 공격과 수비모습을 재현해 주더군요
덕수궁 하마비입니다
말을 타고 이 곳을 지나는 사람은 누구든지 이곳에서부터는 말에서 내려야 한다는 글이 적혀 있습니다.
하마비는 또 왕이나 장군·고관·성현들의 출생지나 무덤 앞에 세워놓기도 하였는데, 이들에 대한 존경심의 표시라고 합니다
말에서 내려 걸어가야 하는데 너무 협소하고 금천교도 너무 작아 안타까울뿐입니다
자원봉사 해설사님을 따라 덕수궁 일원을 탐방합니다
덕수궁에서 대한문밖을 내다본 풍경속에 뾰족하게 보이는 '원구단'입니다
고종은 1897년 경운궁과 마주 보이는 이곳에 '원구단'을 짓고 조선이 황제국임을 하늘에 고하고 황제에 올라
연호를 '건양'에서 '광무'로 고쳐 1897년을 광무 1년, 고종 황제를 광무제라 했습니다
▽ 덕수궁 이야기들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의주로 피난 갔던 선조가 1년 반만에 한양으로 돌아왔으나, 한양의 모든 궁궐은 왜군에 의해 불타 없어져 머물 궁궐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당시 황화방(皇華坊)에 위치한 월산대군(月山大君) 후손의 집과 인근의 민가 여러 채를 합하여 임시 행궁(行宮)으로 삼고 '시어소(時御所)'로 머물게 되었으니, 이것이 훗날 덕수궁(경운궁)의 시작이었다.
선조는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궁궐을 재건하려 했으나, 당시의 궁핍한 국가재정 상황 등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 1608년 2월 정릉동 행궁 정전(석어당 추정)에서 승하하고 만다. 선조의 뒤를 이어 이 곳에서 즉위한 광해군은 1611년 창덕궁을 재건하여, 그해 10월 창덕궁으로 이어(移御)하면서 '경운궁(慶運宮)'이란 이름을 비로소 짓게된다. 병조판서 이항복을 시켜 경운궁의 담장을 두르고 궁궐로써의 면모를 가다듬는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하지만 광해군은 곧 다시 경운궁으로 돌아와 머물다 1615년 창덕궁으로 아주 이어(移御)를 한다.
한편 1623년 인조반정의 성공으로 광해군을 폐위시킨 인조는 광해군에 의해 경운궁에 유폐되어 있던 인목대비로부터 왕으로 인정을 받고, 경운궁 별당(즉조당 추정)에서 즉위한 뒤 인목대비를 모시고 창덕궁으로 이어하게 된다. 이때 인조는 선조가 머물던 즉조당과 석어당 두 곳만 남기고, 나머지 경운궁의 가옥과 대지를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고 경운궁을 아주 떠나게 된다. 이로써 경운궁은 왕이 공식적으로 머물며 국정업무를 보던 궁궐로써 기능을 마감하였다.
그런 경운궁이 다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 것은 1895년 10월 경복궁에서 명성황후가 무참히 살해된 을미사변(乙未事變)이 일어난 후 부터이다. 을미사변으로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1896년 2월 세자(순종)와 함께 러시아공사관으로 급히 피신하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을 단행하여 무려 1년이 넘게 러시아공사관에서 머물던 고종은 마침내 1897년 2월 경운궁으로 환궁(還宮)하게 된다.
당시 경운궁 주변 정동 일대는 러시아,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서양세력들의 근거지였던 만큼, 이를 이용해 일본을 견제하려는 의도도 있었던 듯하다.
같은해(1897년) 8월 고종은 연호(年號)를 광무(光武)로 반포(頒布)하고, 10월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정한 뒤 원구단(圓丘壇)에서 황제 즉위식을 갖는다. 이처럼 경운궁의 또 다른 역사는 대한제국(大韓帝國)의 선포와 더불어 열강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시작되었다.
경운궁은 고종이 본격적으로 임어하게 되면서 그에 걸맞는 궁궐의 격식을 갖추어 나갔지만, 1904년 4월 함녕전에서 비롯된 대화재로 인해 경운궁은 또 한번 큰 시련을 겪는다.
중화전을 비롯한 석어당, 즉조당, 함녕전, 궐내각사(闕內各司) 등 중심부에 있던 건물들이 모두 잿더미가 되고, 경운궁(덕수궁)은 이전의 모습을 크게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현재 석조전을 제외한 덕수궁의 모든 건물들은 이 이후에 재건되었으며, 그 규모도 대폭 축소되고 만다.
그러던 중 1905년 경운궁 중명전(重明殿)에서 소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고, 이에 고종은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1907년 7월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 이준, 이위종을 황제의 특사자격으로 비밀리에 파견하게 된다. 하지만 결국 이로 인해 1907년 8월 일제는 고종을 황제의 자리에서 강제 퇴위시키고, 순종이 경운궁 돈덕전(惇德殿)에서 황제에 오르게 된다. 황제에 오른 순종은 그 해 11월 창덕궁으로 이어(移御)했으며, 이로써 경운궁도 마침내 궁궐로써 그 기능과 생명을 다하게 된다.
이때 순종은 경운궁에 계신 태황제(太皇帝) 고종에게 '덕수(德壽)'라는 궁호(宮號)를 올리는데, 오늘날 덕수궁(德壽宮)이란 이름은 이렇게 얻게 되었다. 한편 덕수(德壽)란 궁호는 왕위를 물려준 '선왕의 덕과 장수를 기린다'는 뜻으로, 특정 고유명사로서가 아니라 물러난 선왕에게 올리는 궁호의 보통명사격인 셈이다. 1919년 고종이 함녕전에서 갑자기 승하하자, 덕수궁은 주인이 없는 궁궐이 되어 일제에 의해 조직적으로 훼손되기 시작한다. (출처:덕수궁 이야기)
8월22일날 역사문화탐방단들이 모일 장소인 중화문입니다
경복궁 근정전이나 창덕궁 인정전 찬경궁 명전전처럼 덕수궁 중화전도 박석으로 만들어져 잘 단장되어 있고 가운데는 종,정으로 시작되는 품계석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조선시대 문무백관의 벼슬 높고 낮음에 따라 정1품에서 종9품까지 18등급으로 품계를 나누었는데 그 품계에 따라 돌에다 품계를 새겼으며 그것을 궁궐의 정전(正殿) 앞 마당에 품계의 순서에 따라 나열하였다. 나라의 조회나 하례, 국왕탄신 등 중요한 행사시에 문무백관이 정렬할 때 자신의 벼슬 품계석 앞에 정렬하였다. 좌우 12개씩 24개가 놓여져 있다. 1품에서 3품까지는 정(正), 종(從)으로 구분하여 6개가 세워져서 문무백과 12개 품계석이 세워졌고 4품에서 9품까지는 정, 종을 구분하지 않고 6개씩 12개가
세워졌다
어좌의 일월오악도와 천정에 발이 일곱개 달린 용이 그려져 있지요
보수중인 즉조당 일원의 석어당 모습니다
정무를 맡아보던 덕홍전과 고종의 침전인 함녕전이 나란히 서있는 모습입니다
덕홍전은 경복궁 건청궁 앞 전기발생지 이후 두번째로 전기가 들어온 곳이랍니다
전등이 보이지요..
덕수궁 함녕전은 1897년(광무 1)에 고종이 머물렀던 침전으로 세워졌으며, 1904년(광무 8)에 화재로 불에 타서 그해 다시 지은 건물로, 순종에게 선위를 물려준 고종이 1919년 1월 22일 승하한 곳으로 독살로 인하여 옷을 못 벗길 정도로 퉁퉁 부었다고 하는데 탐방하는 날 그 비극을 다시 들어봐야 할것 같습니다
고종은 정관헌에서 외국사신을 맞이하고 커피를 마셨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커피맛을 본 사람은 누구일까요? 라고 질문을 하더군요
후원으로 이어지는 문입니다
경운궁과 역사를 같이한 오래된 소나무 등이 많은데 이곳에는 아름드리 회화나무에 얽힌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더군요
전통적으로 편전과 침전이 따로 있었으나 두곳이 함께 설계된 근대 건축물 석조전입니다
대한제국 황실의 주도로 1897년 대한제국 선포 직후 영국인 건축가 하딩이 설계를 했고 1919년까지 고종 황제의 정궁으로 사용했다
2층과 3층은 사전예약제로 15명의 예약자에 한해서 출입을 할수 있었으나 1층은 자유롭게 출입이 가능합니다
석조전 1층에는 개화기를 지나 근대문명을 받아들이던 대한제국의 역사를 한눈에 바라볼수 있게 설명들이 잘 되어 있더군요
석조전 앞뜰에 설치된 앙부일구(해시계)의 의의와 보는법을 설명해 놓았습니다
국립현대미술관 별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석조전 건물입니다
일제시대 해방의 대서사시라는 제목으로 화가 이쾌대가 1930년에서 1950년까지 남긴 그림들을 전시하고 있었으며 그는 일제강점기, 해방기,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한국역사의 비극적 시대였고 민족의 역사와 전통을 주제로 독자적인 예술세계를 확립하였으나 6.25전쟁 이후 월북하면서 끝을 맺게 되지요
광명문은 원래 함녕전의 남쪽 정문이었는데 흥천사 누각과 범종 그리고 신기전기화차을 갖다 놓으면서 이곳으로 옮겼다는데 가장 해석이 난해한 문이 되고 맙니다
덕수궁 돌담길입니다
이 길을 걸어가면 배재학당과 정동제일교회가 보이고 서울시립미술관과 주요 외국공관들이 자리를 잡고 있지요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천경자 미술전을 관람하고 덕수궁 사전탐방을 마칩니다
미흡한 글이지만 사진으로나마 예습하실수 있도록 미리 올려 드리니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8월22일 역사문화탐방에서 뵙겠습니다
2015.8.11.
풍경소리 이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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