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특집]지리산 피아골, 단풍속으로
블랙야크 전종현 세르파님과 함께 떠나는 역사문화 탐방[단풍특집]이 지리산 피아골에서 진행되었다.
가수 이용이 부른 10월의 마지막밤을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성삼재에서 출발하여 지리십경의 하나인 '피아골단풍' 을 감상하고
천년고찰 '연곡사'에 들러 동부도와 북부도 등 국보와 보물까지 해설을 듣고 귀경하는 트레킹코스였다.
조선시대 유학자 남명 조식 선생은 '피아골 단풍을 보지 않고는 단풍을 보았다고 말하지 말라' 라고 하며,피아골 단풍을 '삼홍(三紅)'이라고 하였다.
즉 온 산이 붉게 타서 '산홍(山紅)'이요
단풍이 비친 물빛까지도 붉다하여 '수홍(水紅)'이라...
피아골을 오가는 사람들의 마음까지도 붉어져서 '인홍(人紅)'이라 부르리...
이렇게 피아골 단풍을 '삼홍(三紅)' 이라고 부르고 천하제일 단풍 명승지로 손꼽아 왔다
[삼홍소 三紅沼]
- 남명 조식(1501~1572) -
흰구름 맑은 내는 골골이 잠겼는데
가을에 붉은 단풍 봄꽃보다 고와라
천공(天公)이 나를 위해 뫼빛을 꾸몄으니
산도 붉고 물도 붉고 사람조차 붉어라.
지리산과 피아골 곳곳에 고스란히 남아있는 질곡과 격동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서 알아보고 트레킹 코스 중심으로 스토리를 엮어가 볼까 한다
♡ 일시 : 2015.10.31(토) 07:00~
♡ 코스 : 성삼재~돼지평전~피아골삼거리~피아골대피소~남매폭포~삼홍소~연주담~직전마을~연곡사 주차장
♡ 누구랑 : 블랙야크 역사문화 탐방/트레킹 도전단과 함께....
[지리산으로 들어가는 길]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공원이며 민족의 영산, 어머니의 산으로 손꼽히는 지리산에도 가을빛이 벌써 지고 있었다.
지리산은 노고단에서부터 천왕봉까지의 25km의 주능선을 근간으로 피아골, 뱀사골, 백무동계곡, 칠선계곡을 위시한 12계곡으로 나뉘어 있다.
주능선에서 번지기 시작한 가을빛이 열두폭 치맛자락을 타고 골골마다 흘러내려 사람의 마음까지 물들이기 시작한다는 그곳
지리산 피아골을 향하여 사당역을 출발한다~
단풍철을 맞아 고속도로 곳곳이 차량으로 정체되어 예상시간보다 늦은 12시30분쯤 성삼재에 도착한다.
지리산 둘레길 1코스 출발점인 남원시 주천면 내송리 마을을 지나 춘향묘가 있는 육모정과
아홉마리 용이 살았다는 구룡폭포가 있는 구룡계곡을 지나 김대성 세르파님의 고향인 고기리라는 마을을 지난다
초등학교 시절 고모님이 그곳에 살고 계셔서 여름방학이면 가끔 놀러가서 머루와 다래도 따먹고 선유폭포 아래까지 올라가 계곡에서 퐁당하던 추억들이 떠오른다.
지금 생각하니 그곳은 고지대여서 한여름인데도 모기가 없고 선선하여 일찌감치 고급피서를 즐긴것이 아닌가 생각한다...ㅎㅎ
[육모정과 구룡폭포와 구룡계곡(창고사진)]
[정령치]
구불구불한 정령치를 지나 달궁계곡과 갈림길에서 성삼재 방향으로 올라가다 보니 노고단과 반야봉 사이에 있는 하늘아래 첫동네 심원마을도 보인다.
정령치는 높이 1,172m나 되는 고개로 서산대사 휴정(休靜 1520~1604)의 《황령암기( 黃嶺庵記)》에 의하면 마한의 왕이 진한과 변한의 침략을 막기 위해
정(鄭)씨 성을 가진 장군을 파견하여 지키게 하였는데 이로 인해 정령치(鄭嶺峙)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정령치에서 산행을 시작하여 서북쪽 능선을 타면 겨울철 설산등반과 봄철 철쭉산행지로 유명한 고리봉~세걸산~부운치~팔랑치~바래봉이 이어지고
남쪽 능선을 타면 만복대~묘봉치~고리봉~성삼재로 연결된다.
겨울철이면 폭설로 도로통제가 다반사로 이루어지는 위험한 도로이기도 하다.
구례 천은사 문화재 관람료때문에 지름길로 올라왔지만 멀미가 있는 분들은 오늘 고생깨나 했을것 같다.
이원규 시인이 "....지리산은 변하면서도 언제나 첫 마음이니 행여 견딜만 하다면 제발 오지 마시라." 하고 노래했듯이
우리의 일상에서도 서두르지 말고 참고 기다려한다는 가르침을 준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성삼재]
지리산 능선 서쪽 끝에 있는 고개로, 높이 1,102m이다.
마한 때 성씨가 다른 세 명의 장군이 지켰던 수비성터에서 성삼재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고갯마루에 주차장과 휴게소, 전망대 등이 잘 조성되어 있으며 용산역에서 11시쯤 기차타고 구례구역에 내려서 택시타고 올라오거나
무박으로 달려와 지리산 종주를 시작하는 출발점이 되기도 한다.
대부분 새벽에 이마에 불달고 올라가기 때문에 이길을 낮에는 처음본다는 사람도 의외로 많다...ㅎㅎ
우측 길옆 배수로에는 벌써 얼음이 얼어 있었다.
노고단 대피소 아래 언덕에는 풍토병을 예방하고 여름휴가를 위해 1920년대 건립되었던 외국인 선교사들의 휴양소 흔적이 지금까지 남아있다.
[노고단 대피소]
이곳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단체사진을 찍었으나 오늘 걸어가야할 코스가 길어 먼저 떠난 분들이 많아 몇명 찍히지 않았다.
화엄사에서부터 코재를 거쳐 힘들게 올라와 노고단에서 섬진강 너머로 저녁노을을 구경하고
대피소 처마밑에서 비박을 하고 주능선으로 떠나던 때가 그립기도 하다
[노고단(老姑壇)]
노고할매가 지켜주는 산...
'노고'는 '할미'의 도교식 이름이라고 한다
노고단은 박혁거세의 어머니인 선도성모를 국모로 모시고 제사를 지낸곳이라고 한다
세르파님의 해설에 따르면 천왕봉엔 천신(天神)의 딸인 '마고할미'가 주재하고, 노고단엔 '할미'라고 불렸던 신이 주재한다고 합니다
지리산 제단은 원래 천왕봉에 있었는데, 고려 때 노고단으로 옮긴 것으로 추정되고
조선시대엔 현재의 구례군 광의면 온당리에 단을 세우고 제례를 지냈다고 합니다
나중에 장터목 근처에 있는 '제석단'에 대해서도 살펴 보아야 하겠다
<마고할미 전설(반야봉)> 퍼온글
지리산 산신 중 여신(女神)인 천왕봉의 '마고할미'는 선도성모(仙桃聖母) 또는 노고(老姑)라 불리는데 바로 천신(天神)의 딸이다.
마고할미는 지리산에서 불도를 닦고 있던 도사 '반야(般若)'를 만나 결혼해 천왕봉에서 살았다. 그들은 딸만 8명을 낳았다.
그러던 중 반야는 더 많은 깨우침을 얻기 위해 가족들과 떨어져 반야봉으로 떠났다. 그리고 마고할미가 백발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마고할미는 반야봉에서 깨우침을 얻기 위해 외로이 수도하는 남편 반야를 그리며 나무껍질을 벗겨 남편이 입을 옷을 만든다.
그리고 마고할미는 딸들을 한명씩 전국 팔도에 내려 보내고 홀로 남편을 기다린다.
기다림에 지친 마고할미는 끝내 남편 반야를 위해 만들었던 옷을 갈기갈기 찢어버린 뒤 숨지고 만다.
또 매일 같이 얼굴을 비추어보던 산상의 연못은 신통력을 부려서 메워 없앴다.
이 전설의 흔적은 지금도 지리산에 남아 있다.
그녀가 메워버린 못을 누군가 천왕봉 밑 장터목에서 찾아내 '산희샘'이라 부르고,
찢겨져 흩어진 반야의 옷은 소나무 가지에 실오라기처럼 걸려 기생하는 풍란으로 되살아났다고 한다.
그래서 지리산 풍란은 '환란'이라는 별칭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후세 사람들은 반야가 불도를 닦던 봉우리를 반야봉이라 불렀고 그의 딸들은 8도 무당의 시조가 됐다는 이야기이다.
반야봉 주변에 안개와 구름이 자주 끼는 것은 하늘이 저승에서나마 반야와 마고할미가 만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 한다
<전설2> 퍼온글
마야고(마고)는 어느 날 사모하는 반야의 옷 한 벌을 지어놓고 반야가 오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고원에 핀 쇠별꽃이 바람에 일렁이며 물결칠 때마다 마야고는 행여 반야가 달려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에 사로잡혔다.
마야고는 마침내 신명나게 머리채를 나부끼며 그 꽃잎 물결 속으로 반야의 옷을 든 채 달려갔다.
그리고 무엇을 잡을 듯이 허우적거렸지만 아무리 찾아보아도 그리운 반야는 보이지 않았다.
쇠별꽃의 움직임을 착각한 마야고는 수치와 분노를 못 이겨 얼굴을 손바닥에 묻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자신을 속인 쇠별꽃을 다시는 피지 못하게 하고 반야의 옷은 갈기갈기 찢어서 불어오는 바람에 흩날려버렸다.
또 매일 같이 얼굴을 비추어보던 산상의 연못은 신통력을 부려서 메워 없앴다.
이 전설의 흔적은 지금도 지리산에 남아 있다.
그녀가 메워버린 못을 누군가 천왕봉 밑 장터목에서 찾아내 '산희샘'이라 부르고,
찢겨져 흩어진 반야의 옷은 소나무 가지에 실오라기처럼 걸려 기생하는 풍란으로 되살아났다고 한다.
그래서 지리산 풍란은 '환란'이라는 별칭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 노고단 고개로 올라가는 표지목이다
▽ 노고단 정상은 탐방예약제를 실시하고 있었다
뾰족하게 서 있는 모습이 멀리서도 잘 보이는 노고단 정상 돌탑이 보인다
▽ 노고단 고개에서 지리산 주능선으로 향하는 통과문이다
▽ 지리산 주능선 포토존에서 인증샷을 남겨 본다
[돼지평전]
예로부터 멧돼지들이 좋아하는 둥굴레가 많이 나는 곳이어서 이름이 생겼다고 하며
또 하나는 원추리 뿌리를 캐먹는 멧돼지들의 모습이 많이 목격되어 돼지평전이 됐다는 설도 있다
지금은 지리산 반달곰 복원사업에 따라 방사한 37마리의 반달곰에 대한 주의사항과 대처요령이 곳곳에 붙여져 있지만 만나지 않기를 바랄뿐이다
실제로 몇년전 여름에 백무동 망바위 근처 숲에서 먼발치였지만 시커먼 반달곰을 목격한 적이 있어 신경이 곤두 서기도 한다
[아..지리산이여!]
[지리산(智異山)] 1915m. 1967년 12월 27일 우리나라 첫 국립공원으로 지정.
금강산, 한라산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삼신산(三神山)의 하나로 알려져 있으며, 삼신산의 하나인 방장산(方丈山)이라고도 한다.
지리산 권역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시기는 마한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한의 도성이 지리산 달궁으로 피난했다는 설이 전해지며,
산청에 있는 구형왕릉은 신라왕국을 피해 6세기경에 지리산 자락에서 마지막을 맞이한 가야국의 전설을 잘 드러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지리산 자락 골골이 숨어들어선 전통마을의 역사적 기원이나 형성동기를 보면 많은 경우가 조선시대의 전란을 피해 입지하고 있다.
지리산의 험난한 역사는 삼한과 가야 및 삼국시대에는 국경의 접변지대로 싸움터의 무대였고,
고려 때는 왜구의 침입과 민란의 현장이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대변되는 침략의 밀물을 겪어야 했다.
근대엔 동학민중운동과 한국전쟁에서 피로 얼룩진 전쟁터였다.
구례의 석주관과 고려 말 이성계가 섬멸한 남원의 황산대첩비지, 여원치와 피아골 등은 왜적을 막던 지리산의 역사적 현장이며,
특히 석주관에는 정유재란 때 순절한 의사의 위패를 모신 칠의단과 승병 및 의병을 모신 비석이 당시의 역사를 웅변하고 있다.
더욱이 지리산은 현대사에 접어들어 1948년 10월 여수순천사건에서 시작해 1955년까지 계속된 좌우 대립의 치열한 격전으로 수만 명의 목숨이 꽃잎처럼 진 곳이다.
지리산의 지리적 입지는 국가적인 요충지로서의 중요성과 아울러 국토의 남쪽 변방이라는 이중성을 지니고 있었다.
바다에 인접해 외국의 선진 정보를 수용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새로이 유입된 문화의 발상지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지리산 권역에서 불교문화의 역사, 지리적 전개 양상을 보더라도 그렇다.
통일신라의 국찰이자 화엄십찰의 하나인 구례 화엄사의 입지는 국가적 요충지로서의 지리적 위상을 대변하고 있다.
하지만 신라 말에 새로이 중국에서 유입된 선종의 구산선문 중에 실상산문의 실상사, 동리산문의 태안사 등 2개 산문 역시 지리산 권역에 동하였던 것이다.
지리산은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 운다.
첫째, 신라5악(岳) 중 남악으로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智者]으로 달라진다’ 하여 ‘智異山’이라 하였다.
둘째, 조선 태조 이성계가 왕위를 찬탈하려고 명산에 기도를 드리러 다닐 때였다.
백두산과 금강산 신령은 쾌히 승낙하였는데 지리산 신령은 승낙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혜(智慧)가 다른[異] 신선이 사는 산이라 하여 지리산(智異山)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셋째, 백두산이 흘러와 된 산이라 하여 백두산(白頭山)의 '두(頭)'에 흐를 '류(流)'를 더해 두류산(頭流山)이라고도 하고,
남해에 이르기 전에 멈추었다 하여 머물 '류(留)'를 보태어 두류산(頭留山)이라고도 한다.
이를 순우리말로 지리산의 산세가 두루뭉실하여서 '두루' '두리'를 한자로 차자하여 두류(頭流)가 되었다고도 한다.
또한 사명당 유정(惟(政)은 우리나라 명산을 이렇게 비교하여 말하였다.
“금강산은 수이부장(秀而不壯)이요, 지리산은 장이불수(壯而不秀)요, 묘향산은 역수역장(亦秀亦壯)이라 하여 높이 1,909m의 산세가 기묘하고 향기를 풍긴다.”
▽ 노고단 포토존에서 당겨본 반야봉과 그 뒤로 천왕봉이 보인다
▽ 피아골 삼거리로 가는 길목에 있는 조그만 초원지대로 여름철이면 야생화가 지천으로 널려 있는곳이며
반야봉 근경과 피아골과 불무장동 방향으로 전망이 탁 트인 포토존이기도 하다
전남 하동 악양 평사리가 고향이라는 이 분...
최참판댁 이야기를 나누며 이제 한고비 넘겼으니 더욱 건강하시기를 기원해 본다
[피아골삼거리]
신정길의 신택리지에 따르면 유몽인은 지리산을 “우리나라 모든 산의 으뜸”이라며
“인간 세상의 영리를 마다하고 영영 떠나 돌아오지 않으려 한다면 오직 지리산만이 편히 은거할 만한 곳이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아~피아골!!!
이름만 들어도 섬뜩했던 피아골은 임진왜란, 동학농민운동 그리고 대한제국 말에는 의병전쟁의 결전장이었고,
더구나 한국전쟁 직후에는 빨치산의 근거지였기 때문에 치열한 접전이 수없이 벌어졌던 곳으로
그때 죽어간 사람들의 피가 골짜기마다 붉게 물들었기에 피아골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하며,
그들의 넋이 나무마다 스며들어 피아골의 단풍이 유난스레 붉다고도 한다.
실제로 김진규 주연의 피아골이라는 영화로 제작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예로부터 이 지역에선 오곡 중의 하나인 피(기장)를 많이 가꾸었기 때문에
피밭골이라 부르던 것이 피아골로 바뀐 것이라는 설이 설득력이 있으며 직전마을의 이름도 직(稷), 즉 기장직자를 사용하고 있다
▽ 여기서 직진하면 물맛 좋기로 유명한 임걸령 샘터와 반야봉과 삼도봉(낫나리봉)의 갈림길인 노루목이 나온다
[피아골 유래]
‘피아골’ 이란 영화 탓에 흔히들 한국전쟁 때 이곳에서 동족상잔의 피를 많이 흘려 피아골로 부르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다.
그러나 이곳은 예부터 피아골이라 불려 오는 유서 깊은 곳이다.
[피아골 계곡 내리막길]
- 지리십경 (智異十景) -
제1경: 천왕일출(天王日出), 어느 산인들 해가 뜨지 않으랴만 천왕봉에서의 일출구경은 "삼대가 덕을 쌓아야 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보기가 어렵다,
제2경: 직전단풍(稷田丹楓), 피아골의 단풍. 피아골은 지리산의 울음주머니로 이데올로기 대립 때문에 이 계곡에 흘린 피가 많다 하여 피밭골(직전)에서 유래,
제3경: 노고운해(老姑雲海), 지리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산허리를 휘두른 구름인데 특히 노고단에서 바라보는 경관을 으뜸으로 칭한다.
제4경: 반야낙조(般若落照), 해가 떨어지면서 구름바다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불덩어리는 자연이 만든 화려한 잔치다.
제5경: 벽소명월(碧宵明月), 벽소령은 예부터 화개에서 마천으로 넘나드는 고개였다. 이 고갯마루에서 바라보는 밝은 달은 동양화처럼 아름답다.
제6경: 세석(細石)철쭉, 해마다 5월말이면 지리산에서는 고운 분홍색 철쭉이 피어나 지상낙원을 이룬다.
제7경: 불일현폭(佛日懸瀑), 지리산에서 규모가 가장 큰 불일폭포에서 쏟아지는 물보라로 인해 지리십경에 들게 되었다. 냉기 때문에 한여름에는 한기를 느낄 정도다.
제8경: 연하선경(烟霞仙境), 연하봉의 이끼 낀 기암 사이에 가득 들어찬 고사목 숲은 기괴한 아름다움으로 빛난다.
제9경: 칠선계곡(七仙溪谷), 천왕봉에서 북쪽으로 흘러내려 급류를 이루는 이 계곡은 한여름에도 추위를 느낄 정도로 골이 깊고 수량도 풍부하다.
제10경: 섬진청류(蟾津淸流), 지리산을 남서로 감돌아 비단 폭을 펼쳐놓은 듯한 섬진강.
비록 열 번 째 경치로 꼽히기는 하지만 지리산 자락에서 내려 보는 섬진강 풍광은 조물주가 아니고는 그려낼 수 없을 정도로 환상적이다
▽ 가파른 하산길로 접어들어 피아골 대피소를 향해 내려갑니다
[피아골대피소]
현재 김종복씨가 대피소 산장지기로 있는데, 지리산 대피소 중 민간이 운영하는 건 피아골대피소와 치밭대피소(천왕봉에서 대원사로 가는 방향에 있는 대피소) 둘 뿐이다. 2013년에 작고한 함태식 옹은 노고단대피소를 거쳐 피아골대피소 산장지기로 38년간을 살았다. 산장지기 김종복씨는 함 옹의 아들로 통하는 인물이라고 했다.
피아골 대피소는 예부터 명당지처로 많은 이들이 이곳을 찾았으나 한국동란 후 슬픈 역사를 지닌 곳이 된다.
살아 생전 함태식 옹의 말에 의하면 1984년 60명 수용규모로 건물을 지을 때 빨치산 유해로 추정되는 인골이 1트럭 분량 나왔다고 했다
▽ 수도꼭지를 잠그지 말라는 표시가 있으며 식수가 가장 풍부한 대피소중의 하나다
▽ 박배낭을 짊어지고 올라가는 백패커의 뒷모습이다
▽ 클린산행도 하며 시간이 지체되어 서둘러 본격적인 단풍길 트래킹에 나선다
▽ 능선길은 벌써 초겨울 풍경이었지만 피아골 대피소를 거쳐 직전마을로 내려가는 주변 계곡에는 아직 단풍이 남아 있었다
▽ 구계폭포 출렁다리다
[삼홍소]
피아골 대피소에서 남매폭포를 지난 지점 즉 연곡사에서 4킬로미터쯤 산길을 올라오면 오랜 세월 동안 다져진 원시림이 골짜기로 이어져 반야봉(般若峰), 임걸령(林傑嶺), 불무장(不無長)까지 계속되는데 이 골짜기의 삼홍소(三紅沼) 일대를 홍류동(紅流洞)이라 불렀다고 한다
메년 10월이면 불타는 단풍잎으로 산도, 물도, 사람도 빨갛다는 뜻이다.
▽ 피아골에 자생하고 있는 버섯 종류 안내판 옆에 설치된 버섯모양의 나무다
▽ 숲이 이루어지는 5단계 안내표지다
▽ 차가 다닐수 있는 임도가 설치된 표고막 표지목이다
▼ 피아골 단풍축제를 맞이하여 단풍소원 리본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취업을~ 합격을~ 등등...
그 만큼 이 시내에 이루고자하는 소원들이 많다는 것이겠지요
[직전마을]
피아골의 유래는 옛날 연곡사의 수많은 승려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박토의 땅에 벼가 아닌 피를 심던 “피밭골”이었는데 이를 부르기 쉽게 “피아골”로 바뀌었으며,
그 증거로 연곡사 위에 있는 “직전마을”의 “직전”이 한자로 쓰면 피 직(溭), 밭 전(田)을 써 직전(溭田)이다. 그 직전마을에서부터 피아골 산행이 시작된다.
부지런히 직전마을에 도착하니 차가 연곡사 주차장에 있다고 한다
날이 어두워지고 있어 30여분을 더 걸어가야 한다
다행히 내려가는 길에 차를 합승했으나 연곡사주차장에 도착하니 깜깜하여 연곡사 탐방은 포기하고 만다
피아골 미완성 트레킹을 다시한번 더 와야 할 이유가 생긴것인가?
내년에는 조금 앞당겨 도전을 해야 단풍구경을 제대로 할것 같다
천년고찰 연곡사의 동부도(鷰谷寺東浮屠:국보 53호), 연곡사북부도(국보 54호), 연곡사3층석탑(보물 제151호), 연곡사현각선사탑비(玄覺禪師塔碑:보물 제152호),
연곡사서부도(보물 제154)와 '의병장 고광순 순절비'에 대한 내용은 자료를 찾아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겠다
[피아골 탐방을 마치며]
지리산 시인 이원규 선생의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이라는 시로 대신하고 싶다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 이원규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천왕봉 일출을 보러 오시라
삼대째 내리 적선한 사람만 볼 수 있으니
아무나 오지 마시고
노고단 구름바다에 빠지려면
원추리 꽃무리에 흑심을 품지 않은
이슬의 눈으로 오시라
행여 반야봉 저녁 노을을 품으려면
여인의 둔부를 스치는 유장한 바람으로 오고
피아골의 단풍을 만나려면
먼저 온몸이 달아오른 절정으로 오시라
굳이 지리산에 오려거든
불일폭포의 물방망이를 맞으러
벌 받는 아이처럼 등짝 시퍼렇게 오고
벽소령의 눈 시린 달빛을 받으려면
뼈마저 부스러지는 회한으로 오시라
그래도 지리산에 오려거든
세석평전의 철쭉꽃 길을 따라
온몸 불사르는혁명의 이름으로 오고
최후의 처녀림 칠선계곡에는
아무 죄도 없는 나무꾼으로만 오시라
진실로 지리산에 오려거든
섬진강 푸른 산그림자 속으로
백사장의 모래알처럼 겸허하게 오고
연하봉의 벼랑과 고사목을 보려면
툭하면 자살을 꿈꾸는 이만 반성하러 오시라
그러나 굳이
지리산에 오고 싶다면
언제 어느 곳이든 아무렇게나 오시라
그대는 나날이 변덕스럽지만
지리산은 변하면서도 언제나 첫 마음이니
행여 견딜만 하다면 제발 오지 마시라
2015.10.31. 풍경소리 이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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