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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킹/역사문화탐방

「광복 70주년 기념」경복궁 옛이야기 속으로(1편)

by 풍경감각 2015. 8. 15.

「광복 70주년 기념」

태극기 휘날리며 역사문화 탐방 경복궁(景福宮), 옛 이야기 속으로...

 

광화문 육조거리에서 수정전까지 (1편)

 

이미 술에 취하고 덕에 배부르니 군자는 만년토록 그대의 큰 복을 누리리...

(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景福)

 

경복궁 이름은 태조의 명을 받은 정도전이 시경(詩經)의 대아(大雅)의 기취(旣醉, 이미 취하다)에 나오는 시구(詩句)에서

 따온 이름으로 '큰 복을 누리며 번성하라' 는 뜻이다

 

 

 

광복 70주년 블랙야크 명산100

태극기 도전단....

 

♡ 탐방테마 : 전종현세르파와 함께 떠나는「광복 70주년 기념」 역사문화 탐방 경복궁, 옛 이야기 속으로

♡ 탐방일정 : 8월 15일(토) 09:00 조선의 법궁 경복궁 일원

♡ 탐방코스 : 육조거리(황토현) - 광화문 – 흥례문 – 금천과 영제교 – 근정문 – 근정전 – 사정전 - 강령전  – 수정전 – 경회루 – 교태전 – 아미동산 - 자경전 – 향원정 – 열천 – 전기발상지 – 건청궁 곤녕합 옥호루 - 고궁박물관(별도탐방)

♡ 탐방시간 : 09:00 ~ 17::00 (도보 이동 및 해설포함)

 

 

 

♡ 경복궁 개요

 

경복궁은 조선의 법궁으로 1395년(태조 4년)에 1차 완공되고 궁궐의 담장은 1398년(태조7년)에 완공됩니다

궁궐에는 법궁과 이궁이 있고 법궁은 국왕이 머무르는 공식 궁궐들 가운데에서 으뜸이 되는 궁궐을 말하지요

 

경복궁의 명칭과 근정전(勤政殿),사정전(思政殿),강령전(康寧殿) 등 각 전각과 문 이름은 태조 이성계의 명을 받은 삼봉 정도전이 유교적 이념에 의해 짓게 되는데 이름 하나하나를 살펴보면 당대 인문정신의 소산이라 칭송받을 만큼 깊은 뜻이 있습니다

물론 세종8년(1426년)에는 집현전에서 광화문(光化門),홍례문(弘禮門),일화문(日華門),월화문(月華門),건춘문(建春門),영추문(迎秋門),영제교(永齊橋)등의 아름다운 이름들이 지어지지요

 

▽ 조선 수도 한양과 5대 궁궐도

 

 

▽ 경복궁 복궐도

 

 

 

'경복궁의 역사'를 간단히 살펴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건국직후 왕위계승권을 둘러싼 왕자의 난이 두차례나 일어나는 과정에서 정종은 재위2년(1400년)에 한양의 지세가 좋지 않다며 개경으로 도읍을 옮기게 됩니다

그뒤 태종은 재위5년(1405년)에 다시 한양으로 환도하면서 창덕궁을 짓고 이어하면서 경복궁을 비워두게 되지요

 

이때부터 조선왕조의 궁궐은 이궁(離宮)체제를 갖추며 그때마다 경복궁과 창덕궁을 옮겨 다니며 국사를 보게 됩니다

태종은 창덕궁에 머물면서도 1411년 경복궁에 명당수( )를 파고 금천()으로 끌어들여 풍수적 형국을 보완하고 그 이듬해에는 경회루를 짓게 됩니다

 

태종 사후인 1426년(세종 8년) 세종이 창덕궁에서 경복궁으로 이어하면서 그제서야 경복궁은 제대로 된 정궁의 모습을 갖추게 됩니다

그리고 1592년 임진왜란으로 불에타 소실된후 273년간 폐허로 남겨져 있다가 고종2년(1865년) 흥성대원군이 대대적인 중건공사로 다시 복원되고 고종5년(1868년)에 완성되었습니다

 

 

 

경복궁의 비운은 끝없이 이어져 명성황후와 대원군의 갈등으로 고종 10년(1873년)에 건청궁을 지어 딴 살림을 차리고 고종13년(1876년)에는 대규모 화재로 창덕궁으로 옮겼다가 1882년 임오군란과 1884년 갑신정변으로 1885년 다시 경복궁으로 돌아오게 되지요

그러나 10년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일어나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이 있었고 1897년 고종이 환궁한 곳은 경복궁이 아니라 경운궁(현재 덕수궁)이지요

그리고 1905년 을사늑약이 이루어졌으니 사실상 조선왕조 법궁으로서 경복궁의 역사는 여기서 끝을 맺게 되지요

 

▽ 경운궁(덕수궁) 중화전 모습입니다

 

 

(다음주 8/22일에 오시면 이천관세르파님의 덕수궁과 대한제국, 정동 역사문화탐방때 개화기에 일어난 역사탐방을 이어서 들을수 있을것 같습니다)

 

경술국치 후 일제에 의해 훼손되고 파손된 경복궁은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1990년부터 복원되기 시작, 1단계(1990~2010)와 2단계(2011~2030)를 거치며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됩니다.

 

▽ 서울역사문화박물관 4층에서 찍은 현재의 경복궁 전경입니다 

 

 

▽ 수문장의 근무모습

 

 

 

♡ 광화문(光化門)광장 사전탐방

 

조선의 상징적 거리 광화문 앞 '6조(六曹)거리'는 오늘날의 세종로로 광화문 앞에서 '황토현(, 현재 광화문사거리)'까지에 이르는 대로다. 1395년 정도전이 조선 태조 이성계의 명을 받고 한양으로 천도를 하면서 조성한 거리로,경복궁의 남쪽 정문인 광화문 앞 좌ㆍ우에 의정부를 비롯한 이조ㆍ호조ㆍ예조ㆍ병조ㆍ형조ㆍ공조의 육조() 등 주요 관아가 배치되어 있던데서 유래되었다.

 

 

임금이 계시는 정전의 정문인 광화문을 중심으로 하여 광화문을 바라본 동쪽에는 의정부(議政府=현재의 국무총리실)와 이조(吏曹 지금의 내무부)ㆍ한성부(漢城府 지금의 서울 시청)ㆍ호조(戶曹 지금의 기획재정부)가, 서쪽에는 예조(禮曹 지금의 외교/교육문화부)ㆍ중추부ㆍ사헌부ㆍ병조(兵曹 지금의 국방부) ㆍ형조(刑曹 지금의 법무부)ㆍ공조(工曹 지금의 문화/건설부) 및 사역원이 차례로 세워졌으며 조선시대에는 7궤() 56척()의 한성부 대로로 국가를 상징하는 가장 넓은 길이었으며,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 앞에 직선으로 개설되어 '주작대로' 기능을 하였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 '광화문통'으로 명명되다가 오늘날 '세종로'가 되었다

 

 

 

지금은 이순신장군과 세종대왕 동상이 우뚝 서 있으며 광화문 지하역사에는 각각 '이순신 장군 기념관'과 '세종대왕 기념관'이 자리잡고 있다

 

 

 

 

▽ 세종대왕 기념관 일부모습이다..

 

 

 

평소에 광화문역에서 내려 광장에 올라서면 세종대왕 동상과 무궁화꽃 사이로 멀리 광화문과 백악산이 한눈에 보이던 곳에는

광복7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각종 시설물이 설치되어 있고 주요 건물마다 대형 태극기가 걸려 있다

 

 

 

 

 

♡ 광화문(光化門)에 들어서다

 

광화문(光化門)이란 이름은 '광피사표화급만방(光被四表化及萬方)' 에서 따왔는데 "나라의 위엄과 문화를 널리 만방에 보여준다"라는 뜻입니다.

 

 

광화문은 남문이라서 천정에 주작(南朱雀)이 그려져 있고 북문인 신무문에는 현무(北玄武)가, 동문인 건춘문에는 청룡(左靑龍)이, 서문인 영추문에는 백호(右白虎)가 그려져 있습니다. 광화문 안쪽으로는 넓은 마당이 펼쳐지는데 이곳에는 삼도가 설치되어 있지 않았고 이곳은 궁궐을 지키는 군사들이 머무르는 곳으로 궁이 아니라 궐에 해당되는 곳입니다. 지금도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의 수비군인 교대식이 열리는 곳입니다.

 

 

♡ 광화문 해태(해치)상

 

신호등을 건너 광화문으로 들어서려고 하면 커다란 해태 두 마리가 떡하니 마주보고 버티고 있습니다. 속설(俗說)에 의하면 관악산이 화산(火山)이어서 그 화기(火氣)가 경복궁에 미치어 화재를 발생시킬 염려가 있어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불을 먹는다는 상상의 동물인 해태를 광화문 앞에 세웠다는 것인데 그럴듯하지만 사실이 아니러고 하네요. 물론 관악산 연주대에는 홈을 파서 물을 담아두었다고 하지요. 이름부터 '해태'가 아니라 '해치'로 최근에는 서울시의 상징동물로 해치라고 올바르게 부르고 있어 다행이라고 합니다(물론 해태와 해치를 함께 부르기도 하지만요)

 

해치는 중국 요(堯) 임금 때 출현한 상상의 영물(靈物)로서 눈매가 부리부리하고 정수리엔 외뿔이 있고 목에는 방울이 달려 있고 몸은 비늘로 덮여 있으며 매우 영리하여 선악(善惡)을 구별하는 능력과 사람의 시비곡직(是非曲直)을 판단하는 신령(神靈)서러운 재주가 있습니다. 중국의 <이물지(異物志)>에는 해치에 대해 '성정이 충직하여 사람이 싸우는 것을 보면 바르지 못한 사람은 뿔로 받고, 사람이 다툴 때는 옳지 않은 사람을 뿔로 받는다'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징성 때문에 해치는 인간의 죄를 다스리는 사헌부(司憲府) 앞에 놓여있었습니다. 그래서 사헌부 수장(首長)인 대사헌(大司憲)의 흉배(胸背)에는 해치가 그려져 있습니다. 참고로 문반(文班)의 흉배에는 학(鶴)이 그려져 있고 무반(武班)의 흉배에는 호랑이가 그려져 있는데 당상관(堂上官)인 정삼품(正三品) 이상은 두 마리가 당하관(堂下官)인 종삼품(從三品) 이하는 한 마리가 그려져 있었다고 합니다

 

 

드디어 블랙야크 역사문화 탐방」만남의 장소로 고고...

경복궁역 5번 출구 계단에서 조선왕비와 후궁 특별 기획 전시중인 고궁박물관을 지나 만남의 장소로 이동합니다

 

 

경복궁역 5번 출구 고궁박물관앞 계단에서 일찌감치 세르파님이 나오셔서 탐방객들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어제 오후에 잠깐 경복궁에 들러 광화문 광장의 풍경들과 수문장 교대식 그리고 현판 사진 등 을 더 찍어 놓길 정말 잘한것 같습니다

몇몇분들이 늦어지니 세르파님께서 혹시나 광화문 정문 매표소에 기다릴지 모른다는 말씀에 한바퀴 돌아와보니 거의 모든분들이 다 오셨더군요

만일 제가 안돌아 오고 감감무소식이었면 '함흥차사' 가 되는것인가요? ㅎㅎ

 

[함흥차사 일화/펀글]

 

태조(太祖)는 아들들의 권력 다툼이 화를 불러일으키자 정치의 뜻을 버리고 서울을 떠나 고향인 함흥으로 돌아갔다.

만년에는 불도에 정진하다가 1408년(태종8년) 5월 24일 창덕궁 별궁에서 74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심부름을 보냈는데 감감무소식인 사람을 흔히 '함흥차사'라고하는데 그 일화가 여기에서 시작되지요

함흥차사는 원래 태종이 ‘함흥에 있는 이성계를 모셔오기 위해 보낸 '사신’을 가리키는 것이다.

세자 책봉에 불만을 품은 이방원(훗날 태종)이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국을 어지럽히자, 태조는 왕위에서 물러나 한양을 떠났다.

방원이 왕위에 오른 후로는 문안을 위하여 태조에게 차사를 보냈으나, 그 때마다 돌아오지 않아 ‘함흥차사’라는 말이 생겨났다고 한다.

 

야사에 따르면 태종이 차사를 보낼 때마다 태종에게 몹시 화가 난 이성계가 이를 모조리 죽여 버렸다고 하나, 이는 역사적 사실과는 다르다고 한다.

1차 왕자의 난 이후 이방원에 대한 분노를 삭히지 못한 태조는 경기도 양주 땅에 있는 회암사와 강원도 오대산, 함경도 안변, 항주 등으로 다섯 번이나 홀연히 한양을 떠났다. 이때마다 태종은 이성계에게 차사를 보내어 그의 마음을 위로하고 돌아올 것을 종용하였는데, 그 중에서 희생된 사람은 마지막 차사인 박순과 내관 노희봉 뿐이며, 이들도 이성계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니라 반란군에 의해 희생된 것이라고 한다.

함흥차사에 관한 이야기는 후세에 와서 호사가들이 태종과 태조의 갈등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부풀린 것이라고 회자되고 있다는데 맞는말인지 모르겠다

 

 

 

'법천사 지광국사 현탑'이 있는 쉼터에서 만나 출석을 부르고 태극기를 나누어 줍니다

 

 

 

♡ 세르파님과 도전단 자기소개와 경복궁 탐방 안내 및 태극기 전달식....

 

전국적으로 동시다발적으로 블랙야크 100명산 도전단 태극기 휘날리며 행사가 시행되어서 그런지 아니면 인기 초절정의 탐방 프로그램 신청 조기 마감으로 미쳐 신청을 못한것인지 새로운 얼굴들이 많이 참석한것 같았습니다

 

 

8.15.광복절 70주년을 맞아 이렇게 각자 자기소개가 이어집니다

아이들과 가족 그리고 도전자들끼리 삼삼오오 참석하여 역사를 배우고 문화를 익히며 현장에서 직접 답사하고 전문가 해설을 듣는다는것은 참으로 의미가 있는 일입니다

 

 

 

 

 

 드디어 용성문을 지나 광화문과 흥례문사이 광장(궐)으로 들어섭니다

'태극기 도전단 단체사진' 을 찍고 천록이 있는 금천 영제교로 향합니다

 

 

 금천()과 영제교(永齊橋)

 

경복궁은 풍수지리사상에 입각하여 명당자리에 들어서게 했지만 바로 명당수가 모자랐는데 이를 보완하기 이해 궁궐 서북쪽 물을 끌어들여 만든 것이 금천입니다. 금천은 물만이 아니라 북악산 정기를 궁 안으로 끌어오는 구실도 합니다. 북악산에서 흘러들어온 물과 서쪽에서 들어온 물이 합쳐져 근정문 앞을 지나는 금천을 이루는데 영제교(永濟橋)는 바로 이곳에 설치한 다리입니다. 영제교의 길이는 13.85m, 너비는 9.8m 가량으로 비교적 넓으며 세칸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중앙이 3.4m, 그리고 양쪽이 각각 3.2m씩입니다. 다리에는 팔각의 돌난간을 설치하였고 네곳의 엄지기둥에도 석수를 조각하여 설치했다


태종은 창덕궁에 머물면서도 1411년 정승 하륜 등의 건의를 받아들여 경복궁에 서류동입(西流東入) 또는 서출동류(西出東流)하는 명당수()를 파고 금천()으로 끌어들여 풍수적 형국을 보완하고 그 이듬해에는 경회루를 짓게 됩니다

 

 

조선의 궁궐에는 중요한 다리나 건물 주위에는 잡귀와 사악한 것을의 근접을 막기 위해 이처럼 '상상의 동물'들을 설치합니다

영제교의 네마리 서수(瑞獸)는 조선 후기의 석조 미술을 대표하는 조각 솜씨를 보여주고 있는 가운데 힘찬 발톱과 부릅뜬 눈, 억센 비늘 속에 생동하는 힘이 잘 표현되어져있는데, 천록이라고 합니다. 돌짐승을 혹은 해태, 혹은 산예((狻猊 사자 모습을 한 전설상의 동물)라고 하지만, 해태는 털이 있어야 하고, 산예는 사자 모양이어야 하는데, 그런 특징이 보이지 않고 뿔이 하나인데다가 비늘이 있는 것을 보면 전형적인 천록상입니다.

 

 

 

이 돌조각은 경복궁 창건 당시부터 있었던 것으로 조선시대 뛰어난 조각 작품의 하나로 그 중 한 마리는 이상하게도 등에 구멍이 나 있고, 또 한 마리는 일찍부터 없어져 2001년 영제교를 복원할 때 새로 조각하여 짝을 맞춰 둔 것이라고 합니다


 

 

♡ 하루 세차례 이루어지는 수문장교대식 장면을 모아 보았습니다

 

 

 

 

 

 

♡ 경복궁의 구조와 배치

 

경복궁은 정문인 광화문, 중문인 흥례문, 정전인 근정전, 편전인 사정전, 왕의 침전인 강녕전,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을 축선상으로 잇고 있다.

이는 축선에 맞추어 건축물을 배치함으로써 조선의 통치 이념이 역으로 중문과 정문을 거쳐 도성의 백성들에게 왜곡되지 않고 잘 전달되기를 바라고, 더 나아가 남문인 숭례문을 통해 온 나라 백성들에게 잘 전달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소망을 담고 있다.

 

조선시대 궁궐의 공간 구조는 크게 내전과 외전, 동궁, 생활주거공간, 후원. 궐내각사, 궁성 문 및 궐외각사 등으로 나뉜다. 경복궁은 고대부터 전해져 내려 온 궁궐건축의 제도인 전조후침 및 삼문삼조의 기본배치 원리에 따라 외조, 치조, 연조의 구역으로 크게 나뉘어지며 각기 제 기능에 따른 전각이 배치되었다. 치조 구역에는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이 있고, 그 뒤로 사정전, 만춘전, 천추전이 자리 잡고 있다

 

♡ 흥례문(흥례문)

(弘)(興)으로 바뀌다...

 

흥례문(옛이름은 홍례문)은 궁성의 정문인 광화문을 들어서면 바로 마주하는 궁내에서 첫 번째로 맞는 궐문이다.

 광화문부터 이 흥례문까지는 단순한 길만이 조성되었으나, 흥례문 안쪽부터 근정문 그리고 근정문 안쪽에서 근정전 월대까지 이르는 길은 어도로 이루어졌다.

 

 

흥례문의 원래 이름은 홍례문(弘禮門)으로, 고종 때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당시 청나라 건륭제(乾隆帝)의 이름이 홍력(弘歷)이므로 그 이름자를 피하기 위해 홍(弘)을 흥(興)으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 근정문

 

현존하는 조선 왕궁의 정전 정문 중 유일하게 중층 건물로 남아 있는 근정문은 3문으로 되어있는데 큰 가운데 문으로는 왕만이 드나들고 동쪽의 일화문(日華門)으로는 문관(文官)이, 서쪽의 월화문(月華門)으로는 무관(武官)이 드나들었다고 한다. 근정전과 마찬가지로 근정문에서도 왕위 즉위식 등 중요한 행사가 치러졌다. 왕이 승하하면 왕세자는 근정문에서 즉위식을 거행한 후에 근정전 옥좌에 앉는 절차를 밟았다.

 

조선 왕조의 왕위 계승은 선왕이 승하하거나 왕의 자리를 물러났을 때 이루어졌다. 건강 악화, 반정 등의 이유로 세상을 뜨기 이전에 왕의 자리를 물러난 경우는 27대 왕 중 태조, 정종, 태종, 단종, 연산군, 광해군, 고종 7명의 경우에 불과하며, 나머지 20명의 왕은 모두 승하한 후 다음 왕에게 국새를 넘겨주었다. 따라서 조선 왕 대부분의 즉위식은 선왕의 장례 기간에 이루어졌다

 

왕의 즉위식은 선왕이 승하한 지 6일이 지난 후 거행된다. 선왕의 시신을 모신 빈전의 동쪽에 왕세자가 머물 여막을 치고, 유언장과 국새를 여러 가지 의장물과 함께 설치하여 새 왕에게 국새를 건네 줄 준비를 한다. 왕세자는 여막 안에서 입고 있던 상복을 벗은 다음 예복인 면복(冕服)을 갈아입고 빈전의 뜰로 나아간다. 그리고 선왕의 유언장과 국새를 받아 각각 영의정과 좌의정에게 전해주고는 여막으로 돌아간다.

 

여막에서 다시 나온 왕세자는 붉은 양산과 푸른 부채를 든 자들에게 둘러싸여 가마를 타고 어좌에 설치된 정전으로 향한다. 이리하여 왕세자가 오른쪽 계단을 통해 어좌에 올라앉는 순간, 새로운 왕이 탄생하게 된다. 즉위교서가 반포된 후 정전에서는 향을 피우고, 즉위식장을 가득 매운 대소 신료들은 두 손을 마주잡아 이마에 얹으면서 '천천세(千千歲)' 라고 외친다. 이는 왕조의 운명이 오래도록 영원하라는 뜻이다

 

 

♡ 행각

 

행각은 근정전의 둘레에 장방형으로 배치하여 감싸고 있는데 근정문 좌우측, 남행각이 연결되는 곳에는 작은 편문인 일화문과 월화문이 있고, 북행각 중앙부에는 사정전으로 통하는 솟을문 형식의 사정문이 있고 육방창과 땅을 상징하는 사각형돌과 하늘을 상징하는 원형의 돌기단이 있으며 '줄행랑치다' 라는 말의 유래가 된곳이기도 하다

 

 

♡ 폐도와 어도

 

궁궐의 모든 길은 삼도(三道)로 이루어져 있고  가운데가 약간 높이 솟아있는데 이곳을 특히 폐도(陛道)라 하고 임금만이 다닐 수 있는 길이고 동쪽의 길은 문신(文臣)이, 서쪽의 길은 무신(武臣)이 다니는 길입니다. 그래서 가운데 길인 폐도는 임금만 다닐 수 있어 폐도를 다니는 사람을 일러 '폐하(陛下)'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중국의 황제에게만 그렇게 부를수 있었다는...ㅜㅜ..그럼 조선은 전하...ㅜㅜ

 

 

 

답도에는 삼족오인 봉황이 새겨져 있다

 

 

 

 

 

 

♡ 근정전(勤政殿)

 

경복궁 근정전은 조선시대 법궁인 경복궁의 중심 건물인 정전으로 신하들이 임금에게 새해 인사를 드리거나 국가의식을 거행하고 외국 사신을 맞이하던 곳으로 ‘근정(勤政)이란 이름은 천하의 일은 부지런하면 잘 다스려진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삼봉 정도전이 지었다고 합니다

 

이곳에서는 한 달에 네 번씩 열리는 조회(朝會)인 조참(朝參)의식과 삼명절(三名節)인 정월초하루, 임금 및 왕비의 생신날 그리고 동짓날에 하례(賀禮)를 드리는 조하(朝賀)의식이 열렸던 곳입니다. 그리고 임금의 즉위식도 거행되어 정종, 세종, 단종, 세조, 성종, 중종, 명종, 선조 등 여덟 분이 이곳에서 등극하였습니다.

 

상월대, 하월대, 바닥이 1m가 높은 정전 앞마당과 박석, 차일고리, 품계석, 드무, 정(鼎),월대 동물상, 난간기둥의 12지신상, 답도 등을 유심히 살펴보면서 거기에 얽힌 이야기를 들어보는것도 재미 있을것이다

 

 

 

조선의 법궁(法宮)인 경복궁의 정전(正殿)은 이중월대(二重月臺) 위에 당당하게 서 있고 앞 넓은 뜰에는 삼도(三道)의 양 옆으로 품계석(品階石)이 일렬로 늘어서 있고 그 주위로는 다듬지 않은 돌인 박석(薄石)이 깔려 있는데 울퉁불퉁한것은 햇빛의 난반사를 막고 신하들이 신던 돼지가죽 신발의 미끄러짐을 방지하고 위엄있게 걷기 위함이라고 한다

 

 

 

법궁(정궁) : 왕이 항상 머무르는 궁으로 우리나라는 경복궁이 정궁의 역할을 하였다

이궁 : 왕이 행차할 때 머무르던 궁. 행궁이라고도 한다

편전 : 궁궐에서 왕이 각종 사무를 보는 곳

정전 : 궁궐에서 왕이 나와 조회를 하던 곳

 

 

 어도 좌우에는  ‘품계석’이 서 있는데 근정전에서 행사를 할 때 신하들이 자신의 지위에 맞게 줄을 설 수 있도록 표시한 돌로 근정전을 바라보면서 오른쪽(동쪽)에 있는 품계석에는 문신들이 차례로 줄을 서고 왼쪽(서쪽)에는 무신들이 품계석에 따라 줄을 서게 되었답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조정은 북쪽보다 남쪽이 1미터 정도 낮은 북고남저(北高南低)의 형태로 경사(傾斜)져 있는데 이는 배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라고합니다

근정전 구역은 조정은 박석과 품계석으로 월대는 이중의 화강암 기단으로 모두 석물로 이루어졌는데 딱 세 종류의 쇠붙이가 있는데 왕권을 상징하는 '청동 솥, 즉 정(鼎)', 화마(火魔)가 물에 비친 자기 형상을 보고 놀라 달아나게 한다는 '드무' 햇빛을 가릴 때 사용하였던 '차일 고리'입니다, 차일고리는 들기름에 볶아 지금도 녹이 슬지 않고 반짝거린다고 하지요..

 

▽ 차일고리

 

▽ 근정전의 이중월대 상단에 놓여 있는 청동항아리로서 왕권을 상징하는 정(鼎)

 

 

드무

 

이중월대 하단 동쪽 귀퉁이에 있는 가마솥 같은 커다란 철물로 순우리말인 '드므'라고 하며 이곳에 물을 담아 놓아 화마(火魔)가 물에 비친 자기 형상을 보고 놀라 달아나게 한다는 궁궐의 화재를 막기 위한 많은 주술적인 소박한 바람이 담겨져 있는 것이지요

 

 

박석

 

거친 박석을 놓은 것은 신하들이 조심스럽게 다니도록 하고난반사를 막아주고 미끄러움을 방지하기 위해  일부러 만들었고  합니다

고궁 탐방할때는 조심스럽게 왕처럼 번 걸러 보시지요...ㅎㅎ

 

 

▽ 삼족오라는 답도

 

 

 

 

 

근정전 월대

 

 

 

근종전 월대에는 동서남북을 지키는 청룡·백호·주작·현무와 시간과 방향을 나타내고 지키는 12지신 가운데 쥐·소·호랑이·토끼·뱀·말·양·원숭이·닭 등을 볼 수 있는데 개와 돼지는 보이지 않는데 기 이유는 태조 이성계가 돼지띠라지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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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정전 천장의 칠족 쌍용

 

 

 

 

내부옥좌의 '어좌'와 '일월오봉도'

 

 

 

▽ 여봐라...으흠...(고궁박물관 어좌 모형에서 쭈그리고 찍은 사진입니다.ㅎㅎ)

 

 

▽ 근정전 향로와 자기입니다

 

 

 

 

♡ 부시와 삼지창과 오지창

 

경복궁을 둘러보다가 건물 기둥과 지붕 처마 밑에 마치 그물처럼 생긴 것들이 있는데 이 그물은 ‘부시’라고 합니다. 새들이 날아와 처마 밑에 둥지를 짓거나 걸터앉지 못하도록 만든 것이지요. 새똥으로 인한 단청이나 목조건물에 피해를 주지 않도록 명주실 등으로 짜서 만들었다고 합니다. 물론 삼지창과 오지창도 둥지를 못 틀게 한것이구요...그물망이 보이지요..삼지창은 따로 못 찍었네요

 

 

 

♡ 잡상과 어처구니

 

 

♡ 7가지 잡상의 의미 (경회루에는 잡상이 11개까지 있다고 하네요)

 

1. 대당사부(大唐師父) : 잡상의 처음 앞자리에 놓이는 대당사부는 당나라 때 현장이라는 고승으로 흔히 삼장법사(三藏法師)로 알려져 있다. 삼장법사는 손오공과 저팔계, 사오정 등과 함께 인도로 불경을 구하러 간다. 사람의 얼굴에 삿갓을 쓰고 있는 모습이다.

2. 손행자(孫行者) : 손행자는 손오공(孫悟空)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삼장법사를 호위하며 인도로 동행한다. 원숭이의 모습에 삿갓을 쓰고 있다.

3. 저팔계(猪八戒) : 삼장법사와 손오공과 동행하는 멧돼지다.

4. 사화상(獅晝像 또는 沙和尙) : 손오공·저팔계와 함께 삼장법사를 호위한 사오정을 뜻한다. 본래 옥황상제를 모시던 동물이다.

5. 이귀박(二鬼朴) : 불교 용어에 가까운 말로, ‘이귀(二鬼)’ 즉 ‘이구(二求)’는 중생이 가지고 있는 두 가지 욕구로서 낙을 얻으려는 득구(得求)와 낙을 즐기려는 명구(命求)를 뜻한다.

6. 마화상(馬畵像) : 말(馬)의 모습을 가진 잡상이다.

7. 삼살보살(三殺菩薩) : 삼살이란 살(煞)이 끼어 불길한 방위라는 뜻인데, 보살이 불교에서는 부처님을 따르고 중생을 가르치는 성인(聖人)임을 생각할 때 삼살보살이란 모든 재앙을 막아 주는 잡상이라는 의미다.

 

지붕 맨 위 좌우 끝에 있는 장식기와를 ‘취두’라고 하고 취두 아래로 내려오면 ‘용두’ 라고 하는데 궁궐에 불이 나지 않도록 지켜주는 상상의 동물들이 지붕을 지키고 있는 셈이지요

 

 

♡ 어처구니 유래

 

어처구니란 맷돌의 손잡이 부분을 가리키거나 궁궐등의 건물 기와에 쭉 늘어선 사람이나 동물형상, 즉 잡상 등을 말하는데 어이없다의 속어로 쓰이기도 하죠.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쓰는 어처구니 유래는 궁궐이나 성문을 짓는 와장들이 지붕의 마무리 일로 어처구니를 올리는데 이것을 실수로 잊어버리는 경우가 간혹 있었다고 합니다. 옛날에는 궁궐이 불에 타면 어처구니가 없어서 불에탄 것이라고 생각했다는데 여기서 '어처구니 없다'라는 말이 나왔다고 합니다.

 

 

 

♡ 사정문과 사정전

 

 

 

♡사정전

 

경복궁의 편전으로 왕이 평소에 정사를 보고 조정회의, 업무보고, 문신들과 함께 경전을 강론하는 곳입니다

사정전은 마루로 되어 있어 온돌이 설치된 천추전 만춘전을 이용하기도 하였지요

 

 

 

 

 

 

 

 

 

 

♡ 왕의 침전(寢殿)인 강령전(康寧殿)

 

경복궁(景福宮) 내전이며 왕의 침전(寢殿)으로 왕이 일상을 보내는 거처로 내외 종친을 불러 연회를 하거나 왕이 신하들을 불러 은밀히 정사를 논의하는 곳 또한 이곳입니다. 1395년(태조 4)에 창건하고, 정도전(鄭道傳)이 건물 이름을 강녕전(康寧殿)이라고 지었다. 강녕은 오복(五福)의 하나로, 임금으로서 해야 할 이상적인 정치이념을 궁궐 건축에 반영한 유가(儒家)의 사상을 엿볼 수 있다. 강녕전의 동쪽 침전을 연생전(延生殿)이라고 지었고 서쪽 침전을 경성전(慶成殿)이라고 지었다. 강녕전은 임금의 높은 신분을 상징하기에 지붕에는 용마루가 없다

 

1917년 순종이 살던 창덕궁 대조전과 희정당에 큰 불이 나자 강령전은 희정당 교태전은 대조전을 짓는데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창덕궁 대조전ㆍ희정당의 모습과도 다르고 경복궁 강녕전ㆍ교태전의 본래 모습과도 다르게 변형되었다고 하네요

 

 

 

사정전 뒤에는 향오문(嚮五門)을 통하여 들어갈 수 있는 왕의 침전(寢殿)인 강령전(康寧殿)이 있습니다. 향오는 오복(五福)을 향해 나아간다는 뜻으로 오복이라 함은 수(壽), 부(富), 강녕(康寧), 유호덕(攸好德), 고종명(考終命)을 일컫는 것입니다. 수는 오래오래 천수(天壽)를 다해 사는 것이고, 부는 남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고 남을 괴롭히지 않으며 살아가는데 불편하지 않을 만큼의 재물을 소유하는 것이고, 강령은 몸과 마음이 건강하고 편안하게 살아가는 것이고, 유호덕은 덕을 쌓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으로 항상 남을 도우려는 마음을 갖자는 것이고, 고종명은 마지막 죽음에 임해 고통 없이 평온한 모습으로 생을 마감하는 한다는 것입니다. 오복 중에서 세 번째 강령을 따와서 침전의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강령전 건물은 용마루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그곳에 잠을 자는 사람이 바로 용인데 또 다른 용이 필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강령전은 전각의 규모에 어울리지 않게 월대(月臺)가 무척 높고 넓습니다. 임금의 침소 앞뜰에서도 통치행위가 이루어졌다는 증좌일 것입니다. 왕비와 세자가 석고대죄를 청하던 곳이기도 하고 임금의 잘못된 정책에 대하여 조정대신들이 그 부당함을 목숨을 내놓고 바로잡기 위해 읍소하던 곳도 바로 강령전 월대였습니다.

 

 

 

 

 

♡ 경성전

 

 

 

♡ 연생전

 

 

 

 

 ♡ 왕의 비밀창고인 내탕고입니다

천(천), 지(지),.... 자로 시작되지요

 

 

 

 

 

 

 

 

♡천추전(千秋殿 )

 

경복궁 사정전에 부속된 전각이며 임금이 집무를 보는 곳이었다.

임금이 업무를 맡아보는 건물인 사정전(思政殿)에 부속된 건물로 사정전 서쪽에 위치한다. 경복궁 창건 때 지어진 건물이며 동쪽에 위치하는 만춘전(萬春殿)과 좌우대칭을 이룬다. 왕의 공식집무실인 사정전에는 마루만 깔려있었는데 옆에 있는 천추전(千秋殿)에는 온돌이 설치되어 주로 가을과 겨울에 이용했던 건물이다.

문종(文宗)이 이곳에서 승하한 곳이기도 하지요

 

 

 

♡만춘전 (萬春殿)

 

경복궁 사정전을 보좌하는 부속 건물로서 임금이 신하들과 나랏일을 의논하거나 연회를 베풀던 편전(便殿) 가운데 하나이다. 사정전 동쪽(왼쪽)에 위치하여 이름과 같이 봄을 상징한다. 사정전 서쪽(오른쪽)에 나란히 지어진 천추전(千秋殿)과 좌우대칭을 이룬다. 

 

 

 

 

 

♡ 흠경각과 함원전

 

 

 

 

♡ 집현전이 있던 수정전 (景福宮 修政殿) 보물 제1760호

 

수정전은 경회루앞에 있으며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은 훈민정음을 만들고 학문을 연구하고 왕에게 주요 정책을 자문하고 건의하던 기관으로 고종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다시 지은 건물로  갑오개혁 시절에는 군국기무처 및 내각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습니다 ‘수정(修政)’ 이란 의미는 ‘정사를 잘 수행함’ 이란 의미로 현판글씨는 중건 당시 조석원이 썼으며 수정전 정면에는 월대가 있는데 임금의 출입이 자주 있는 편전임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장영실 선생이 만든 자격루를 세웠던곳입니다..

 

 

28번 인정과 33번 파루가 울리는 상세한 내용이 나와 있네요(고궁박물관 탐방사진)

종소리가 광화문을 거쳐 육조거리를 지나 보신각까지....

 

 

 

 

「광복 70주년 기념」

태극기 휘날리며 역사문화 탐방 경복궁(景福宮), 옛 이야기 속으로 2편은 경회루에서 건청궁까지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