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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킹/역사문화탐방

덕수궁 돌담길과 정동길을 걷다

by 풍경감각 2015. 8. 22.

『광복70주년 기념 역사문화탐방』

 

[다시 찾은 빛, 광복!] 민족의 아픔을 딛고...

일제강점기의 흔적과 역사의 아픔이 서려있는『정동길』을 찾아서

 

이천관 세르파님과 함께 한 정동 역사문화 탐방속으로...

 

2015.8.22(토)

 

 

 

 

 

 

 

정동(貞洞)의 유래

 

 

 

 

 

정동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계비인 신덕왕후 능인 '정릉'이 있어 붙여진 지명이다.

 

그러나 이방원이 정권을 잡으면서 지금의 북한산 형제봉 자락의 정릉으로 옮기고 이름만 남아 있다.

 

서울 정동(貞洞)은 흔히 '근대문화 1번지'라고 불리운다

 

 

 

 

 

 

 

 

 

 

 

1883년 미국공사관을 비롯하여 영국, 프랑스, 독일, 벨기에 등 외국공관들이 들어서고 일본 낭인들로부터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이 세자 순종을 데리고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한 아관파천의 현장으로 덕수궁과 을사늑약이 체결된 중명전 등 일정 강점기의 쓰라린 흔적과 근대국가로 변모하기 위한 역사적인 공간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 최초의 서양식 교육기관인 배재학당과 이화학당과 함께 정동교회, 시병원과 보구여관 등이 속속 건립되며 근대 문명의 중심지가 되었다

 

 

 

오늘은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그 역사의 흔적속으로 빠져 봅니다

 

 

 

 

 

 

 

 

 

 

 

덕수궁 돌담길과 덕수궁 전경(서울시청 서소문 별관 옥상에서 촬영)

 

 

 

 

 

 

 

 

 

서울시립미술관(구 대볍원 건물)으로 가는길이다

 

 

 

이곳에는 각종 집터들이 남아 있다

 

 

 

 

 

 

 

 

 

 

 

 

 

 

 

 

 

 

 

 

 

 

 

 

 

돌담길을 돌아 나오면 분수대가 있고 바로 근처에 정동교회,배재학당,이화학당 등이 보이고

 

 이곳은 지금도 각국 대사관들이 자리잡고 있지요

 

 

 

 

 

 

 

가수 이문세가 부른 광화문 연가 '~ ♪ 눈덮인 조그만 교회당~♪~ ' 이 바로 여기에 있지요

 

 

 

 

 

 

 

 

 

중명전(重明殿, 1901, 한민족의 수모...을사 늑약 체결 장소)

 

 

 

대한제국의 운명이 갈린 그 역사의 현장...

 

 

 

 

 

 

 

 

 

 

 

 

 

 

 

 

 

 

 

 

 

 

 

 

 

중명전은 1901년 지어진 황실도서관으로 처음 이름은 수옥헌(漱玉軒)이었다.

 

중명전은 '광명이 계속 이어져 그치지 않는 전각' 이라는 뜻으로 러시아 사바찐이 설계한 우리나라에 궁중에 지어진 최초의 서양식 건물 중 하나이다.

 

사바찐은 구러시아의 장교로 각종 근대식 건축물을 설계하고 을미사변을 현장에서 목격하게 된다

 

 

 

 

타일은 당시 (구)러시아 양식과 문양을 보호하기 위하여 유리판을 깔아 놓았다

 

 

 

 

 

 

 

을사늑약이 체결된 현장이다..

 

늑(勒, 굴레늑)

 

1. 굴레(마소의 머리에 씌워 고삐에 연결한 물건) 2. 재갈, 마함 3. 다스리다, 정돈하다(整頓--) 4. 억지로 하다, 강제하다(強制--) 5. 억누르다 6. 묶다, 졸라매다 7. 새기다, 파다

 

 

 

 

을사늑약(乙巳勒約)

 

 

 

1905년 11월 17일, 일본이 대한제국(大韓帝國, 이하 한국)을 강압해 체결한 조약으로 공식명칭은 한일협상조약(韓日協商條約)이다. 1904년 8월 22일에 재정(財政)과 외교(外交) 부문에 일본이 추천하는 고문(顧問)을 둔다는 내용으로 체결된 ‘외국인용빙협정(外國人傭聘協定, 제1차 한일협약)’과 구분하여 ‘제2차 한일협약(第二次 韓日協約)’이라고도 불린다. ‘을사(乙巳)’라는 명칭은 1905년의 간지(干支)에서 비롯되었으며, 명목상으로 한국이 일본의 보호국(保護國)으로 되어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이라고도 불렸다. 하지만 보호국이라는 지위가 사실상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화(植民地化)를 미화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되어 ‘을사조약’이라는 명칭이 흔히 사용된다. 모두 5개의 조항으로 이루어져 ‘을사오조약(乙巳五條約)’이라고도 불리며, 조약 체결 과정의 강압성(强壓性)을 비판하는 뜻에서 ‘을사늑약(乙巳勒約)’이라 부르기도 한다 (펀글)

 

 

 

 

 

 

 

 

 

 

 

1905년11월18일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된 을사늑약 체결 장소이자,

 

고종이 1907년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네덜란드 헤이그에 이준, 이상설, 이위종의 특사를 파견한 곳이기도 하다

 

  북한산 둘레길 탐방시 찾았던 이준열사 묘역이 생각납니다

 

 

 

 

 

 

 

 

 

 

 

 

 

 

 

 

 배재학당(培材學堂, 1885, 한국 최초의 중등교육기관)

 

 

 

1885년(고종12) 8월 3일 미국의 북감리회(北監理會) 선교부 선교사 아펜젤러(Appenzeller, H.G.)가 설립한 최초의 근대식 남자 중등 사학(私學)으로 현재 배재고등학교의 전신이다.

 

 

 

 

 

 

 

 

 

 

 

처음에는 방 두 칸의 벽을 헐어 학생 2명을 가르치다가, 이를 가상히 여긴 고종황제로부터 <배재학당>이라는 이름의 친필 간판까지 하사받고, 그해 10월에는 학생수가 20명으로 늘었다. 기독교인과 국가 인재양성을 위해 일반 학과를 가르치는 외에, 연설회·토론회 등을 열어 사상과 체육훈련에 힘을 쏟았다. 당시 배재학당에 설치되었던 인쇄부는 한국 현대식 인쇄시설의 시초이며, 학생들로 조직된 협성회(協成會)는 학보를 발간하는 등으로 민중계몽에 힘썼다

 

 

 

 

 

 

 

 

 

 

 

 

 

 

 

 

 

 

 

 

 

 

 

 

 

 

 

 

 

 

 

 

 

 정동교회(貞洞敎會, 1897, 한국 최초의 개신 교회)

 

 

 

가수 이문세의 '광화문 연가' 에 나오는 바로 그 "♪ ~눈덮힌 ♪ 조그만~ 교회당 ♬ "이  정동교회다.

 

 

 

우리나라 교육계와 기독교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 미국의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와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를 꼽을수 있다.

 

언더우드가 첫 예배를 본 것이 1887년 정동 13번지에 위치한 그의 자택인 한옥 사랑채였으며, 이곳에서 이전하여 1910년 신문로1가에 신축한 교회가 '새문안교회'이고, 그가 설립한 교육기관이 '연희전문학교(연세대학교 전신)'이다.

 

 

 

 

 

 

 

 

 

아펜젤러는 1885년 4월 5일에 입국하여 그 해 8월 3일에 배재학당(培材學堂)을 세우고 1887년 9월 정동에 한옥을 구입한 후 방을 나누어 남녀를 구분해 전도를 시작하면서 그곳을 '베델(Bethel) 예배당'이라 하였다.

 

그 후 신도가 늘어나자 현대식 예배당을 건축하기로 하고 1895년 9월에 착공하여 1897년 12월 26일에 봉헌식을 가졌는데 현재까지 유일하게 남아 있는 19세기 교회건물로 우리 땅에 전파된 최초의 '감리교 교회당'이다

 

 

 

1918년에는 한국에서 '최초의 파이프오르간' 이 설치되어 성가대가 운영되었다고 한다

 

 

 

 

 

 

 

 

 

 

 

정동극장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극장 '원각사'를 복원한다는 역사적 소명을 가지고 탄생한 극장으로 때마침 정조 선발대회 프랜카드가 붙어 있다

 

 

 

 

 

 

 

(구)신아일보 본관터...

 

 

 

1965년 창간되었다가 1980년 언론통페합 당시 경향신문과 통합되었다..

 

 

 

 

 

 

 

 

 

 

 

 구(舊) 러시아 공사관(1890, 아관파천의 아픈 역사 현장)

 

 

 

정동의 예원학교 옆으로 난 조금 가파른 길을 오르자면 오른쪽으로 이국풍의 흰색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주변 환경으로 보자면 위치와 형태가 조금 생소하게 느껴지는 르네상스풍의 이 건물은 러시아인 '사바틴'이 설계한 구 러시아 공사관의 일부이다. 정확한 명칭은 ‘구 러시아 공사관 탑’으로, 현재는 건물이라기보다는 기념비에 가까운 건축물이다. 1885년 한러수호조약 체결 후 착공되어 고종 27년(1890)에 준공된 건물로 사적 제253호이다.

 

 

 

 

 

고종 건양(建陽) 원년(1896) 2월 11일, 열강들이 앞 다투어 나라 안으로 밀려드는 가운데 거침없이 압박을 가하는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고종 황제는 세자(순종)와 함께 경복궁을 빠져나와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겨 이듬해 2월까지 머물게 되는데 이곳이 바로 그 역사의 '아관파천' 현장이다.

 

 

 

원래 경운궁(덕수궁) 영역이었던 이곳 정동 언덕에 러시아 공사관이 들어서게 된 것은 궁궐을 비롯한 도성 안을 내려다볼 수 있는 지리적 이점을 이용해 미국·영국·프랑스 등 주변에 공사관을 두었던 국가들을 견제하려는 러시아 측의 정략적인 입지 선정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외세에 의존해 난국을 수습해나가려 했던 고종의 정치적 판단이 얼마나 무모했던가는 역사를 통해 잘 알고 있는 바이다. 구 러시아 공사관은 조선 왕조가 주권을 상실해가던 격변의 시기를 되돌아보게 하는 회한의 장소이기도 하다.

 

 

 

 

 

 

 

 

 

 

 

 

 

 

 

 

 

 

 

 

 

 

 

 

 

 

 

 

 

 

 

 

 

한국 가톨릭 수도원 첫 자리 표지석...

 

 

 

 

 

 

 

(구)러시아 공사관 자리를 탐방하고 이화학당으로 이동합니다

 

 

 

 

 

 

 

 

 

이화학당(梨花學堂, 1886, 한국 최초의 근대 여성 교육 기관)

 

 

 

 

 

 

 

 

 

이화학당 초기의 교사는 여성으로 한정되었다고 하며 다만 한문은 남자선생이 맡는 경우가 있었는데 여학생을 마주 보고 가르치지 못하고, 항상 뒤로 돌아 앉아서 여학생이 묻는 것에만 뒤돌아 앉은 채 대답을 해 주는 식으로 학생을 가르쳤다고 한다...ㅎㅎ

 

 

 

 

 

 

 

또한 처음으로 여학생들에게 손을 번쩍 들고 발가랑이를 벌리며 뜀질을 시키는 체조를 시작했는데 당시 사회의 윤리문제로까지 비약하여 큰 말썽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학부형들은 하인을 시켜  딸들을 업어내 오기에 바빴고, 체조하는 딸 때문에 가문을 망쳤다고 가족회의를 열기도 했다니...ㅎㅎ

 

 

 

 

 

실로 선교사들이 처음으로 이화학당을 세운 것은 여성교육의 개척자(開拓者)의 역할이었고 여성해방의 큰 기쁨이기도 했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말...ㅎㅎ

 

오늘은 안타깝게도 휴관이랍니다...발길을 돌립니다

 

 

 

 

 

1886년 스크랜턴이 서울에 설립되었던 초, 중,고등 과정의 여성 전용 사립학교.

 

 

 

 

 

그 동안 사전에 조사한 자료를 살펴보고 대신한다

 

 

 

 

 

 

 

 

 

 

 

 

 

 

 

 

 

 

 

 

 

 돈의문 터(敦義門 : 서대문, 1396, 4대문 중 하나인 해체 현장)

 

 

 

돈의문(敦義門)은 조선 수도 한양의 4대문중 하나로 서쪽의 큰 정문이라고 하여 西大門이라고 하였다.

 

(유학의 덕목으로 오상지도(五常之道)의 인(仁),의(義),예(禮),지(智),신(信)에서 의(義)를 따왔다)

 

새문, 신문(신문)이라고도 불렀는데 돈의문으로 가는 길에 위치한 중구 정동의 '신문로'나 '새문안길' '새문안교회' 등의 이름은 돈의문의 다른 이름인 서대문에서 따 온 말들이

 

현재 경향신문사 앞 정동사거리에 '돈의문터'라는 표지석만 담벼락에 이렇게 남아 있다

 

 

 

 

 

 

 

 

 

 

 

 

 

 

 

 

 

 

 

 

 

 

 

 경교장(京橋莊, 1938,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김구선생의 역사적 현장)

 

 

 

1945년부터 암살당한 1949년까지 임시정부의 집무실 겸 숙소로 사용한 곳이다.

 

이는 이승만의 이화장ㆍ돈암장, 김규식의 삼청장과 함께 역사적 의미가 깊은 사저로 김구 주석이 이곳에 입주하면서 경교장이라는 이름을 직접 붙였다.

 

이곳은 임시정부 국무회의를 열고, 특히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를 조직하는 등 반탁운동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이 컸다.

 

그러나 김구 선생은 1949년 6월 26일 이 건물 2층에서 안두희의 총탄에 맞아 서거했다

 

 

 

 

 

 

 

 

 

서산대사가 지었다는 시(김구선생의 애창시)

 

 

 

 

 

 

 

 

 

백범 김구 선생 혈의

 

 

 

 

 

 

 

 

 

 

 

 

 

 

 

 

 

 

 

 

 

 

 

경교장은 강북삼성병원에 붙어 있는데 김구 선생과 임정 인사들이 해방 후 집무실과 숙소로 사용하던 곳이다. 경교장은 일제강점기 때인 1938년 지어졌으며 원래 이름은 죽첨장으로 최창학이 주인이었다. 최창학은 일제강점기 광산업에 종사한 거부이며 국방헌금을 내기도 했던 친일사업가였다. 해방 후 최창학이 김구 선생에게 죽첨장을 거처로 제공하였고 김구 선생이 일본식 이름인 죽첨장을 경교장으로 개명하였다. 김구 선생은 1949년 안두희에게 암살되기 전까지 4년 동안 이곳에서 반탁 운동과 통일 운동을 주도하였으며, 임시정부 국무위원회의와 외국 인사들을 만나는 장소로 사용하였다.

 

 

 

 

 

 

 

 

 

 

 

 

 

 

 

 

 

 

 

 

 

1949년 6월 26일

총탄으로 구멍난 유리창이 있는 백범 김구 선생 집무실...

 

대한민국 육군소위 안두희에게 암살당한 현장이다

 

당시 이승만 정권이 배후로 지목되고 협조가 있었다고 하나 끝까지 입다물고 군납으로 잘 먹고 잘 살다가 평범한 **시내버스 운전사의 몽둥이 세례를 받고 숨졌다

 

 

 

   

딩동댕...드디어 골든벨 대회 시작...

 

 

 

어린이들에게 맨날 양보했었는데 어린이들이 둘밖에 없어 오늘 처음으로 O,X 진위형 문제를 통과하였습니다...ㅎㅎㅎ

 

 

 

 

 

 

 

 

 

 

 

 

 

 

 

 

 

 

 

 

 

행복 패밀리 이분들 서로 정답이 틀리다며 티격태격하더니 금방 화해합니다...ㅋㅋㅋ

 

 

 

 

 

 

 

 

 

경희궁 정문....

 

광해군때 지어져 서궐로 불리어졌던 궁궐이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유관순열사, 애국독립지사 등 가슴아픈 역사장소)

 

 

 

공식적인 역사문화 탐방이 끝나고 개인적으로 적십자병원을 거쳐 걸어서 독립문으로 향하였다

 

 

 

차마 옥사를 다 설명할수가 없어 사진으로 대신한다

 

 

 

 

 

 

 

 

 

 

 

 

 

 

 

 

 

독립신문을 발간하고 독립협회를 결성한 서재필 선생 동상이다

 

 

 

 

 

 

 

 

 

 

 

 

 

 

 

 

 

 

 

 

 

 

 

 

 

 

 

 

 

 

 

 

 

 

 

 

 

 

 

 

 

 

 

 

 

 

 

 

 

 

 

 

 

 

 

 

 

 

 

 

 

 

 

 

 

 

 

 

 

 

 

 

 

 

 

 

 

 

 

 

 

 

 

 

 

 

 

 

 

 

 

 

 

 

 

 

 

 

 

 

 

아이야...영원히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며 달려 보자구나...

 

 

 

 

 

 

 

그분들께 광화문에서 담아온 무궁화를 받칩니다

 

 

 

 

 

 

맺음말

 

 

 

 

[다시 찾은 빛, 광복(光復) 70년] 일제강점기의 흔적과 민족의 아픔이 서려있는 정동길을 찾아서...

 

 

그 대단원의 탐방을 마치면서 대한제국의 흥망성쇠와 일제강점기와 해방을 전후한 역사의 현장을 직접 볼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특히 개인적으로 탐방한 서대문형무소역사관과 감옥과 사형장 등 현장을 보고 온 소감은 말로 표현할수가 없을 정도였다

 

 

 

 

서구 열강들의 각축속에 대한제국은 외세를 등에 없고 끝까지 살아남고 싶어 했지만 힘없는자 백척간두, 풍전등화격이라

을사늑약과 경술국치로 일제강점기가 시작되었으니 마음이 착잡할뿐이다

 

 

 

 

어느날 갑자기 찾아온 광복이라고 하지만 3.1운동과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과 해방을 전후한 수많은 애국지사와 순국선열들에 대한 발자취를 더듬어 보면서 정부수립과 6.25전쟁으로 폐허가 된 대한민국의 눈부신 성장과 발전상을 눈으로 보면서 블랙야크 역사문화 탐방을 계속 이어서 참석해볼 생각이다

 

 

우리 역사를 정확히 알고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좋은 프로그램을 기획해 주시고 진행해 주신 이천관 세르파님께 무한감사를 드리고

함께 하신 도전단 여러분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2015.8.22

풍경소리 이규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