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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킹/역사문화탐방

매헌 윤봉길 의사 기념관 탐방

by 풍경감각 2016. 2. 21.

 [매헌 윤봉길 의사 기념관 탐방]

 

♡ 일시 : 2016.2.21(일)

 

♡ 서울둘레길 4-2코스 출발점인 양재시민의 숲 안에 있는 매헌 윤봉길 의사 기념관 탐방

 

서울둘레길은 산과 하천,도심을 따라 걷게 되며 주변에 지명유래와 볼거리,구경거리가 많이 있다.

 

그냥 무심코 걷기보다 잘 알려진 명소와 역사의 현장을 살펴보며 천천히 걷는다는것 또한 큰 의미가 있을것이다

 

앞으로 주말팀 산책의 힘! 을 진행하면서 창포원,망우묘지공원,아차산성.암사동선사유석지,올림픽공원/한성백제박물관,매헌 윤봉길의사 기념관, 낙성대,월드컵공원,서오릉,이준열사묘지,국립4.19민주묘지,손병희선생 묘역과 봉황각,연산군묘.정의공주묘 등을 잠깐씩 둘러보면서 걷는 즐거움에 역사문화와 인문지리 그리고 문학적 감성을 더해 볼까 한다.

 

그 첫번째 탐방지로 지난 일요일 양재시민의 숲에서 사당역까지 둘레길 4-2코스 사전답사를 하면서

방문한 '매헌 윤봉길 의사 기념관'에 대해서 포스팅을 해보고자 한다

 

 

<홍커우 의거>

 

1932년 4월 29일, 중국을 상대로 상하이사변에서 승리한 일제는 홍커우 공원(현재 루쉰 공원)에서

 전쟁에서 패배한 국민당 정부에게 굴욕을 안겨주기 위해서 일왕 탄생 기념 전승 행사를 가지게 되지요.

그러나 윤봉길 의사가 귀빈석에 폭탄을 투척하여 일제의 주요 인사들이 다수 사망하거나 다치게 되는데 이 사건을 '홍커우 의거'라고 부르지요.

 

 

매헌 윤봉길 의사의 상해의거는 당시 군대가 없던 상황에서 자주독립을 위해 택할 수 있었던 최선의 방략이었고

그의 의거는 1920년대 이후 일제의 문화통치로 국내의 민중들이 허무주의와 퇴영, 퇴폐에 빠지던 상황에서 민족을 일깨웠으니 광복의 서곡이었다 할 수 있지요

 

 

 

 

 

윤봉길 의사는 충남 예산군 태생으로 본명은 윤우의입니다.

그는 원래 애국계몽운동에 뜻을 두어 19세 때부터 농촌 계몽을 위해 힘썼지요.

그러나 농촌을 계몽시켜도 일제 통치 하에서는 충분한 성과를 얻을 수 없음을 절감합니다.

 

 

 

 

 

 

 

 

 

 

 

 

 

 

 

 

결국 ‘장부출가 생불환(丈夫出家 生不還, 대장부가 집을 떠나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

이라는 일곱 글자만 집에 남기고 본격적인 독립투쟁을 위해 중국으로 망명합니다.

 

세탁소에서 1년간 일하며 중국 칭다오에 머물던 윤봉길은 신문으로 이봉창 의사의 의거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그리고 당시 임시정부와 한인애국단의 지도자였던 백범 김구를 찾아가지요.

윤봉길은 김구에게 “이봉창 의사와 같은 일로 써달라.”고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4월 29일 전승 기념행사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김구와 윤봉길은 거사 준비에 들어갑니다.

이봉창의 의거로 위기의식을 느낀 일본은 행사 참석자들에게 도시락과 물통정도만을 지참하도록 했지요.

그래서 윤봉길은 독립운동가인 김홍일 장군에게 도시락형 폭탄과 물통형 폭탄의 제조를 의뢰합니다.

 

 

4월 29일 당일, 윤봉길은 김구와의 마지막 식사 자리에서 자신의 6원짜리 시계와 김구의 2원짜리 시계를 바꾸자고 제안합니다.

그의 시계는 앞으로 몇 시간 밖에 쓸 수 없었으니까요. 김구는 “후일 지하에서 만납시다.”라는 말로 작별인사를 합니다.

 

윤봉길은 차를 잡아타고 홍커우 공원으로 향하지요.

 

그리고 윤봉길은 홍커우 공원에서 축하식 진행중 귀빈석 단상을 향해 폭탄을 투척합니다.

이 사건으로 일본군 사령관 시라카와 육군대장이 중상을 입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고, 그 외의 많은 군부 요인들이 중상을 입지요.

 

 

이때 던진 폭탄이 도시락 폭탄이라고 널리 알려져 있으나 정확히는 물통 폭탄입니다.

실제로 도시락 폭탄은 터지지 않았지요.

오랫동안 학계에서는 도시락 폭탄은 자결용으로 준비했다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졌습니다.

하지만 2014년 윤봉길의 조카인 ‘윤주’ 씨가 공개한 조서에 따르면 도시락 폭탄 역시 거사용이었습니다.

 

 

이렇게 일제의 군인들을 저격한 것은 좋았으나 윤봉길은 일본군에게 붙잡혔고 결국 총살당합니다.

그가 처형당했을 때의 나이는 불과 25세였습니다.

 

 

 

 

 

 

현재 윤봉길 유해는 이봉창 의사, 백정기 의사의 유해와 함께 효창공원에 안치되어 있습니다.

모두 지금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위인들이지요.

 

 

 

 

 

 

 

 

 

 

 

 

 

 

 

 

 

강보에 싸인 두 병정에게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하여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 잔 술을 부어 놓으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어머니의 교양으로 성공자를

동서양 역사상 보건대

동양으로 문학가 맹가(孟軻)가 있고

서양으로 불란서 혁명가 나폴레옹이 있고

미국에 발명가 에디슨이 있다.

 

바라건대 너희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가 되고

너희들은 그 사람이 되어라.“

 

윤봉길 의사가 아들 윤모순과 윤담에게 남긴 유서, 보물 568호를 맺는말로 대신하고자 합니다

 

산책의 힘!  둘레길은 도란도란, 둘레둘레, 소곤소곤 이야기하고 걸어가면서

 우리의 문화와 역사, 인문지리 그리고 숲과 자연생태를 함께 찾아 나설것입니다.

 

2016.2월 풍경소리 이규영

 

※ 상기 내용은 제가 알고 있는 지인의 아들이 쓴 이야기 한국사를 많이 참조하여 작성하였고 사진은 직접 촬영한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