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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킹/산성탐방

한양도성 북악산 코스 탐방

by 풍경감각 2015. 9. 28.

서울 한양도성(漢陽都城) 북악산(北岳山) 코스 탐방 이야기

 

♡ 일시 : 2015.9.28(월) 08:30~

♡ 코스 : 경복궁역~자하문고개~창의문~북악산~청운대~숙정문~혜화문~한성대입구역

♡ 누구랑 : 블랙야크 이천관 세르파님과 함께 떠나는 역사문화 탐방단 30명

 

한가위 특집 역사문화 탐방으로 실시된 [북악산 한양도성 둘레길 걷기] 행사에 다녀왔습니다

한가위를 맞아 지리산 아래 고향집에서 슈퍼문도 바라보고 구순이 가까운 양부모님과 하룻밤을 보내면서

 이튿날 아침 조상님께 차례를 지내고 꽉 막힌 고속도로를 달려왔습니다

장거리  운전으로 피곤했지만 또 무엇인가 꼼지락거려야 직성이 풀릴것 같아

귀경후 밤늦게 이천관 세르파님께 급신청하여 창의문~백악산~청운대~숙정문~혜화문까지 탐방을 하였습니다

 


 

[한양도성(漢陽都城)이란?]

 

서울 한양도성(漢陽都城 ; Seoul city wall)은 조선의 도읍지인 한성부의 경계를 표시하고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성이다. 조선을 건국(1392년)한 태조 이성계는 1394년 10월 도읍을 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기면서 태조의 명에 의해 정도전이 한양을 둘러싸고 있는 '내사산(內四山)' 즉 백악산,낙산,인왕산,목멱산(남산)의 등줄기를 성으로 이은 것이 '한양도성(漢陽都城)'이고 1396년(태조 5)에 총 연장 59,500척(尺) 즉 약18.2km에 이르는 성터를 확정하고 전국에서 11만8070명을 동원하여 1396년 1월 9일~ 2월 28일까지 49일간에 걸쳐 축성이 이루어지지요

 

한양도성 너머 사방 10리까지를 성저십리(城底十里)라고 하는데 현재 서울 경계와 비슷하며

성저십리 밖에는 '외사산(外四山)'이라 하여 북한산, 아차산, 덕양산, 관악산이 한양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서울성곽에 대한 상세한 해설이 되어 있는 표지판입니다

 

 

 

오늘 탐방할 북악산 한양도성 코스입니다

 

 

[ 태조,세종,숙종시대의 한양도성 축조 3개 유형]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태조 때 쌓여진 성곽(토성과 석성)이 절반 가까이 무너지자 세종은 1422년 1월15일부터 2월23일까지 38일간 공사로 토성은 모두 헐고 석성으로 고쳐 쌓는다. 숙종때에 와서 다시 축성론(성을 다시 쌓자는 논리)이 대두되어 5군영(五軍營)인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 등 삼군문(軍門)에 명하여 도성을 수축하게 됩니다. 전체 길이 18.627km에 이르는 한양도성은 현존하는 수도의 도성 가운데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랫동안 도성의 기능을 수행했지요

 그 동안 성곽탐방을 가장 흥미로운것은 세시기에 쌓은 도성의 축조방법과 돌의 모양이 작은돌과 메주덩어리, 사각형/장방형 등으로 제각각 달라 쉽게 구분할수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교외(郊外)라는 의미]

 

'한양도성'은 방어를 위한 것이지만 한성의 경계를 표시하고 왕권의 권위를 대내외에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죽어서는 왕, 평민이 따로 없이 누구나 성안에 머물지 못하였으므로 도성은 삶과 죽음의 경계이기도 하였고 왕도 죽으면 교외(郊外)에 묻혀야 했습니다

성문(城門)에서 외사산 기슭에 이르는 곳을 '교(郊)'라 하는데 남대문 밖을 남교, 동대문 밖을 동교, 서대문 밖을 서교, 창의문 밖을 북교라 불렀습니다

요즈음 쓰이는 교외(郊外)라는 말도 교(郊) 바깥이라는 의미로 교(郊)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니 지금의 동교동,서교동의 지명 유래와 백마역 등 교외선도 거기에서 유래한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사진은 북악산에서 바라본 평창동과 북한산 비봉능선임)

 

 

[사대문(四大門)과 사소문(四小門]

 

한양도성은 원래 명칭은 '서울 성곽'이었으나 2011년 7월 사적의 통일된 지정명칭 부여 사업의 일환으로 '한양도성'으로 변경되었고 총 길이는 약 18.2㎞이며

동쪽에는 낙산 트레킹때 보았던 흥인지문(興仁之門;동대문), 서쪽에는 지난번 김구선생 기념관 탐방때 보았던 돈의문(敦義門;서대문), 남쪽에는 남산 달빛 트레킹때 보았던 숭례문(崇禮門;남대문), 북쪽 숙청문(肅淸門/숙정문으로 변경;북대문)의 사대문(四大門)과 그 중간중간에 북동쪽 홍화문(弘化門/혜화문), 남동쪽 광희문(光熙門), 북서쪽 창의문(彰義門/자하문), 남서쪽 소덕문(昭德門/소의문/서소문)의 사소문(四小門)을 내게 됩니다

 

 이 가운데 흥인지문만은 지세가 약한 동쪽을 보강하기 위하여 옹성을 쌓았고 숙청문(숙정문)은 암문(暗門)으로 하여 문루를 세우지 않았으며 남대문은 1396년, 동대문 옹성은 1399년 완성되었지요


그 동안 낙산구간과 남산구간까지 역사문화 탐방 전문 세르파님 해설을 듣고 나니 천천히 걸으면서 탐방이 가능한 코스인지라

 다음번에는 날을 잡아 아주 천천히 한양도성 한바퀴 순성을 해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네요

 

 

[자하문 고개]

 

서울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3번출구에서 내려 약 50미터 전방 버스정류장에서 지선버스 7022번 버스로 환승하여 자하문고개에서 하차를 합니다

(참고로 자하문고개행 지선버스는 7212번, 1020번, 7022번이 운행되고 있으며 약20분 정도 소요됨)

 

[최규식 경무관, 정종수 경사 순직 동상]

 

정류장에 하차하면 별헤는 밤의 윤동주문학관 표지판도 보이고 창의문으로 올라가는 계단 옆에는 1968년 1월21일 청와대를 기습 공격하기 위해 자하문근처까지 침투한 31명의 무장공비를 검문하고 막아서다가 총격을 받고 순직한 당시 종로경찰서 최규식 서장(경무관으로 추서)과 정종수 경사 순직 동상이 서 있습니다.

당시 한겨울 청와대 근처 북악산과 인왕산 일원에서 조명탄을 터뜨리며 치열한 전투를 벌여 거의 대부분 사살되고 김신조를 생포하게 되지요

지금도 선명한 총탄 자국이 남아 있는 호경암과 1.21사태 소나무가 당시 급박한 상황을 잘 보여 주고 있으며 안보교육장으로서 역할도 톡톡히 하고 있지요

당시 생포된 김신조의 기자회견 첫마디가 '박정희 목따로 왔쑤다'라고 했던 섬뜩한 기억이 어렴풋이 나기도 합니다

그 이후로 대대적으로 향토예비군이 창설되었고 지금도 파주 비학산 김신조 루트와 북한산 사모바위 비트, 우이령길등에 그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지요

 

산악마라톤을 좋아하는 나의 최대 관심사는 무장공비들이 시속10km이상 속도로 산악길을 달렸다는 것인데 실제로 대회에 참가해 보면 시속 5km이상 달리기가 쉽지 않은데 무장한 상태로 그렇게 달렸다니 어마어마한 속도라는것을 짐작할수가 있지요..

 

 

 

[븍악산 코스 간단보기 요약본]

 

창의문-청운대-1.21사태 소나무-촛대바위-숙정문

 

 

 

[창의문((彰義門)]

 

'올바른 것을 드러나게 하다'는 뜻이 있는 창의문은 백악산 주변의 경치가 아름다워 자하문(紫霞門)이라고도 하며 지금도 이곳을 '자하문고개'라고도 부르고 있지요

 

창의문은 태조 5년(1396) 도성을 축조할 때 함께 건축되었고 성곽은 약 17km에 달했는데 도성의 동서남북에 4대문(大門)을 두었고, 그 사이에 사소문(四小門)을 만들었고 홍화문(혜화문), 광희문, 소덕문(서소문), 창의문을 일컬어 사소문이라고 하는데, 창의문은 서북쪽의 소문에 해당되며 북한산과 양주 방면으로 통하는 교통로였다

 

 

 

 

오랜시간 사람들이 드나들던 창의문 바닥의 박석은 반질반질 윤이 날 정도였다

 

 

 

 

 

 

성문의 무지개 모양 '월단(월단)'위에는 봉화이 그려져 있는데 발 모양이 닭발의 형태로 그려져 있다고 한다

이는 백악산 모양이 지네를 닮아 독기가 경복궁으로 흘러들어갈수 있으므로 지네와 상극인 닭발을 그렸다고 하니 당시 풍수지리설을 짐작하고도 남을것 같다

 

빗물이 잘 흘내리도록 만들어진 '누혈(漏穴)' 로  한쌍의 아름다운 연꽃모양을 하고 있다

 

 

[창의문에 얽힌 인조반정 이야기]

 

이곳에는 인조반정때 공신들의 이름이 적힌 현판이 지금도 걸려 있다.

'인조반정'은 광해군 15년(1623) 이귀 등 서인 일파가 광해군 및 집권당인 이이첨 등의 대북파를 몰아내고 '능양군(綾陽君 인조)'을 왕으로 옹립한 정변이다. 1623년 3월 12일 이귀, 김유, 김자점, 이괄 등은 반정계획을 진행하던 중 계획이 일부 누설되었으나 예정대로 실행에 옮겨 장단의 이서군과 이천의 이중로군은 홍제원에서 김유군과 합류하였다. 능양군(인조)를 비롯한 반정군은 창의문을 향해 진군하여 문을 깨뜨리고 입성한 뒤 훈련대장 이흥립의 내응으로 창덕궁을 무난히 점령하였다.

 

이에 당황한 광해군은 궁궐 뒷문으로 달아나 의관 안국신의 집에 숨었다가 체포되어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어 강화로 귀양 보내지고 능양군이 왕위에 오르니 이가 곧 인조이다. 후에 영조는 이 거사를 기념하기 위하여 창의문의 성문과 문루를 개축하고 김류(金臘), 이귀(李貴), 이괄(李适), 원두표(元斗杓) 등 1등 공신에서 3등 공신까지의 공신명을 현판에 새겨 걸어놓게 하였는데 지금까지 그 현판이 문루에 걸려 있는것이다

 

 

 

 [풍수지리설에 따른 폐문과 닭과 지네]

 

창의문은 태조 5년(1396) 서울 성곽을 쌓을 때 세운 사소문(四小門)의 하나로 창건되어 창의문이란 이름을 얻었습니다

현재의 문루는 1741년(영조 17) 세운 것으로 사소문 가운데 유일하게 원형 그대로 남아 있는 중요한 유적이지요

1413년(태종 13년)에 풍수학자 최양선이 창의문과 숙정문이 경복궁의 양 팔과 같아 길을 내면 지맥이 손상된다고 주장하였고 이곳의 통행이 왕조에 악영향을 준다는 당시 풍수지리학자들의 주장에 따라 폐문하여 사람들의 통행을 금했다고 합니다

 

문루는 임진왜란(1592) 때 불탔는데 현재의 문루(門樓)는 1741년(영조 17년)에 세운 것으로 4소문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 있는 중요한 유적으로 알려져 있고 1958년 보수했다고 한다. . 이곳의 홍예를 빠져 나와 문루를 올려다보면 위 사진에서 볼수 있듯이 창의문(彰義門)이란 편액이 지금도 선명하다. 도성 8개 문 중에서 가장 잘 보존된 문이기에 큰 손상 없이 깨끗하기 때문이다. 1956년에 이 문을 보수할 때 장여 속에서 묵서(墨書)가 나왔는데 여기에는 '1741년(建隆 6) 6월 16일에 상량(上樑)을 하였다'고 적혀 있어서 건립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었다고 합니다

 

반달형 무지개 월단에는 봉황이 있는데 위에서 설명했듯이 백악산 지형이 지네를 닮아 닭발을 그려 넣었다고 합니다

 

 

[자기소개와 탐방안내 시간]

 

 

 

 

[신분증 등록 후 출입증을 받고 스트레칭으로 몸풀기]

반드시 신분증이 있어야 하며 출구인 말바위 안내소에 출입증을 반납하면 됩니다

 

 

 

[자북정도(紫北正道)]

 

북악산 한양성곽을 조금 타고 가다보면 자북정도(紫北正道)라는 표지석이 나오는데 '자하문 북쪽의 정의로운 길'이라고 해석되며 박정희 前대통령의 친필이라고 합니다

 

 

 

[백악산(白岳山, 북악산 342m)]

 

백색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금강산 줄기가 북한강 물줄기를 몰고 내려오다가 그 강 끝에 이르러 혼신의 힘을 기울여 만들어 놓은 것이 삼각산입니다. 다시 삼각산의 서쪽 봉우리에 해당하는 만경대의 남쪽 줄기가 뻗어 내려와 마지막 용솟음쳐 이루어 놓은 것이 '백악산'입니다. 천하제일 명당 한양의 형세가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동쪽의 낙산은 좌청룡이 되고, 서쪽의 인왕산은 우백호, 남산이 남주작을 이루고, 이들을 거느린 백악산은 북현무에 해당하여 한양 서울은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명당의 요건을 완벽하게 갖췄지요

 

세종로 네거리 부근에서 북악산을 바라보면 산이 마치 하얀 연꽃 봉오리처럼 보여서 ‘백악산’이라 부르고 백의민족을 상징하여 백악상으로 부르다가 조선왕조의 정전인 경복궁을 터 잡아 짓고 난 후로 한양의 북방 진산이 된다 하여 ‘북악산’으로 부르게 되었다고합니다.

 

겸재 정선은 백악산 바로 옆 동네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백악산 곳곳의 세밀한 면모를 상세하게 그렸는데 창의문 입구에도 아래 사진처럼 표지만이 서 있었습니다

 

 

 

 

 

[1.21사태 소나무]

 

앞서 언급했던 1968.1.21.김신조를 비롯한 31명의 무장공비가 청와대를 기습하기 위하여 침투했다가  자하문 근처에서 검문을 받다가 교전을 버리고 인왕산과 북악산으로도주하면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지요. 당시 15발의 총알을 맞은 소나무를 1.21 사태 소나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청운대(靑雲臺)]

 

청운대 북악산 한양도성내에서 가장 조망권이 좋은 곳으로 남으로 경복궁과 세종로 북으로 북한산의 여러 봉우리를 볼수 있었습니다

특히 경복궁과 일자로 열려져 있는 옛 육조거리도 한눈에 들어오고 광화문 광장을  한눈에 내려다 보는 기분이 너무 좋았습니다

 

 

 

[성곽의 축조방식과 각자]

 

태조(1396년)때는 메주덩어리같은 자연석으로...

 세종(1422년)때는 장방형 돌과 잔돌을 끼워넣기 방식으로...

 숙종(1704년)때는 정사각형으로 축성방식이 점차 변화되었지요

 

 

그럼 과연 성은 누가 쌓았을까요?

 태조때 5도 장정들이 동시에 쌓았는데 숙정문과 혜화문 사이는 강원도 장정, 혜화문에서 남산까지는 경상도 장정이 쌓았다 하고

 성을 고쳐 쌓은 세종 때에는 낙산주변 성은 충청도 비인 장정들이 쌓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각자 담당한 구역의 성곽에 각자를 하여 보수를 책임지고 했다는데 그럼 이때부터 실명제가 도입된것인가요?..ㅎㅎ

 

 

 

[곡장(曲墻)]

 

곡장(曲墻)은 성곽의 시설 중 하나로 방어적으로 중요한 지점에 성곽 일부분을 둥글게 돌출시킨 것을 말하고

치성(雉城)도 성곽의 시설 중 하나이지만 성곽 일부분을 네모나게 돌출시켜 적들을 손쉽게 진압할 수 있게 만들었다

성곽을 탐방할때마다 언급된 여장과 근총안과 원총안에 대한 설명도 병행되었지요

 (사진 촬영을 할수 없어 족두리봉,향로봉,비봉,사모바위,문수봉,대남문으로 이어지는 북한산 비봉능선으로 대신합니다)

 

 

 

[촛대바위]

 

일제가 맥을 끊기 위해 쇠말뚝을 박았던 곳으로 청운대에서 바라보면 촛대의 모양이 뚜렷하게 보인다고 합니다

 

 

 

[북대문으로불렀던 숙정문(肅靖門)]

 

숙정문은 종로구 삼청동의 북악산 동쪽 고갯마루에 있는 조선시대의 정북문(正北門)이며 1963년 1월 21일 서울 성곽에 포함되어 사적 제10호로 지정되었다. 서울 성곽의 사대문(四大門) 중 하나로 도성의 북쪽에 있다고 하여 북대문(北大門) 또는 북문이라고도 부른다. 경복궁의 주산(主山)인 백악산의 동쪽 고개에 자리 잡고 있는 이 문은 태조 4년인 1395년에 건립되었다. 처음 성을 쌓을 때에는 북악 쪽으로 끌어당겨서 쌓았는데, 연산군 10년인 1504년 7월에 문의 위치를 동쪽으로 옮겨 지었다.

 

태종 13년에 풍수가인 최양선(崔揚善)이 임금에게 백악산 동쪽 고개와 서쪽 고개는 경복궁의 양팔에 해당하므로 여기에 문을 내면 안 된다고 청하였다. 그의 말을 받아들여 마침내 창의문(彰義門, 일명 자하문)과 함께 문을 폐쇄하고 길에 소나무를 심은 뒤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하였다. 원래 이 문은 높은 산 중턱에 있으므로 길이 험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통행이 빈번하지 않았던 곳이라 이 문을 폐쇄해도 아무런 지장이 없어서 영구히 닫아두었다. 다만 나라에 가뭄이 심할 때에 이 문을 열고 숭례문을 닫는 풍습이 있었다. 이것은 북은 음(陰)이며 남은 양(陽)인 까닭에 가뭄이 심할 때 양을 억제하고 음을 부양하는 음양오행사상에서 나온 것이다.

 

또 다른 이야기도 있는데, 실제로는 용이 없으니까 도롱뇽을 잡아다가 아이들에게 괴롭히게 하여 도롱뇽을 울게 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또 풍수설에 북문을 열어놓으면 음풍(陰風)이 들어와서 서울 사대부가 부녀자들에게 음분(淫奔)이 많이 생긴다 하여 항상 문을 닫아두었다고도 한다. 하지만 정월 보름 전에 부인이 이 문에서 세 번 놀면 액막이가 된다는 속설도 있다.

 

 원래의 이름이 숙청문인 이 문이 어느 때부터 숙정문으로 바뀌었는지 확실하지는 않다. 1976년 문을 복원하고 숙정문이라는 편액을 걸었다. 다락이 없는 암문인 것이 특징인 이 문이 항상 닫혀 있었기 때문에 대체로 창의문을 북문이라고 여겼는데, 1968년 1월에 일어났던 1ㆍ21사태 이후 청와대 경비를 위해 일반인의 출입을 금지했었고 다시 일반인에게 개방한 것은 2006년 4월이다.

 

 

 

 

 

 

 

[말바위 고개]

 

조선시대 말을 이용한 문무백관들이 자주 찾아 쉬면서 글을 읽고 시를 쓰던곳이라고 합니다

 

 

 

[삼청공원과 와룡공원 갈림길에서 길을 잃고 잠시 헤매다]

 

성북동 전망대에서 암문으로 나갔다가 다시 성안으로 들어와야 하는데 직진했더니 삼청공원 방향이라서 다시 돌아옵니다

물론 직진해도 두 길이 만난다고 하는데 성문밖으로 나가보고 싶더군요

 

 

[삼청각과 성북동 비둘기 그리고 간송미술관]

 

삼청각은 1972년 건립되어 1970년~1980년대 한국 기생요정문화의 산실로 알려져 있지요

 여야 고위정치인의 회동과 1972년 남북적십자회담, 한일회담의 막후 협상장소로 이용하였던 곳으로, 제4공화국 유신시절 요정정치의 상징이었던 곳입니다

우여곡절끝에 2000년 5월 22일 서울특별시가 삼청각 부지와 건물을 도시계획시설상 문화시설로 지정하였으며, 리모델링 공사를 끝낸 후 2001년 10월 새로운 전통 문화공연장으로 문을 열었고  세종문화회관이 운영을 맡고 있으며  연중 전통공연이 열리고 있다고 합니다

 

 

 삶의 영역이 확장되면서 자연을 파괴하고 인간성 상실의 의미를 붓끝에 담아

 삶의 터전을 잃고 문명에 쫓기는 비둘기에 비유하여 노래한 유명한 시이지요

 

성북동 비둘기   -김 광 섭 시인-

 

성북동 산에 번지(番地)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그래도 성북동 비둘기는

하느님의 광장(廣場) 같은 새파란 아침 하늘에

성북동 주민에게 축복(祝福)의 메시지나 전하듯

성북동 하늘을 한 바퀴 휘돈다

 

성북동 메마른 골짜기에는

조용히 앉아 콩알 하나 찍어 먹을

널찍한 마당은커녕 가는 데마다

채석장(採石場) 포성(砲聲)이 메아리쳐서

피난하듯 지붕에 올라 앉아

아침 구공탄(九孔炭) 굴뚝 연기에서 향수를 느끼다가

산 1번지 채석장에 도루 가서

금방 따낸 돌 온기(溫氣)에 입을 닦는다

 

예전에는 사람을 성자(聖者)처럼 보고

사람 가까이

사람과 같이 사랑하고

사람과 같이 평화(平和)를 즐기던

사랑과 평화의 새 비둘기는

이제 산도 잃고 사람도 잃고

사랑과 평화의 사상까지

낳지 못하는 쫓기는 새가 되었다

 

 

[간송 전형필 선생의 간송미술관]

 

한국 전통미술품 수집가인 간송 전형필(全鎣弼)이 33세 때 세운 미술관으로 우리나라의 문화재와 미술품, 국학자료 등이 체계적으로 관리되지 못하고 일본인에 의해 해외로 유출되는 것을 막아내기 위해 자신의 전재산을 들여 이들을 수집하여 세운 미술관이지요

간송의 스승이었던 오세창이 지은 보화각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다가 간송 전형필이 사망(1962년 사망)하고 난 후 1966년 간송미술관으로 명칭을 변경했다고 합니다

 

대개의 박물관이 전시를 주된 사업으로 하고 있는 데 비해 전시보다는 미술사 연구의 산실(産室)로서의 역할을 주로 한다. 연구소에서는 매년 2회에 걸쳐 논문집 《간송문화(澗松文華)》 발행과 함께 전시회를 열고 있는데, 《간송문화》는 1971년 창간되었고 발행된 책자로 《추사명품집(秋史名品集)》 《겸재명품집(謙齋名品集)》 등이 있다. 국보급의 문화재만도 10여 점이 소장되어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훈민정음(국보 70호)이 손꼽히며 고려청자는 청자상감운학문매병(국보 68호)이 대표적인 것이다. 그외 국보급 문화재로 조선백자, 불교 유물로 금동불상 등 다양하다. 특히 국내 최고의 서화를 다수 소장하고 있는데 미술품으로는 신윤복의 《미인도》와 풍속화 그리고 김홍도의 《마상청앵(馬上聽鶯)》 , 겸재 정선의 《풍악산내총람》《청풍계》, 《독백탄》 등이 유명한 소장품이다. 또한 정조, 안평대군, 한석봉, 추사의 글씨가 있다. 간송미술관은 일년에 두번 전시회를 열어 일반에게 공개되는데 봄과 가을에 한차례씩 두번을 공개한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참조)

 

 

 

[길상사]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의 사찰로 삼각산 남쪽 자락에 자리잡고 있지요

삼청각, 청운각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요정으로 꼽혔던 대원각의 주인이 '법정 스님'의 '무소유 철학'에 감화를 받아 조계종 송광사의 말사로 시주하면서 아름다운 사찰로 거듭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맘때쯤이면 도심에서 꽃무릇을 감상할수 있는 곳이기도 하지요

 

 

[북정마을]

 

말바위 가기전에 전망대에 올라 성북동을 조망하고 암문(暗門)으로 성너머에 나가 보았습니다

잘 정돈된 성곽길을 따라가다보면 허른하지만 웬지 정이 넘쳐 흐를것 같은 서울 마지막 달동네 북정마을이 나타나는데

 달콤한 개발유혹을 뿌리치고 달동네로 남아있기를 자청한 아름다운 마을이라고 합니다

 

군데군데 끊어진 성곽을 찾아 내려오다보니 '서울왕돈가스'와 경신고등학교 앞에서 완전히 끊겨 버리더군요

 여기서부터 혜화문까지 주택가를 따라 성곽은 온데간데 없이 군데군데 성돌만 남아있었습니다

 

 

 

 

 

 

[혜화문]

 

 도성에는 4개의 대문과 4개의 소문(小門)이 설치되었는데 이 문은 동문과 북문 사이에 세워졌다고 하여 '동소문(東小門)'이라고도 합니다

처음에는 문 이름을 '홍화문(弘化門)'이라 하였다가 1483년(성종 4) 새로 창건한 창경궁의 동문을 홍화(弘化)라고 정함에 따라 혼동을 피하기 위하여 1511년(중종 6) 혜화로 고쳤습니다

 

1684년(숙종 10) 문루(門樓)를 새로 지은 후 한말까지 보존되어 오다가 1928년 문루가 퇴락하였으므로 이를 헐어버리고 홍예(虹霓)만 남겨 두었는데, 일제는 혜화동과 돈암동 사이의 전차길을 내면서 이마저 헐어버려 그 형태도 찾을 수 없도록 만들어버렸습니다. 당시 북문(북대문)은 일반인의 통행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이 문은 양주·포천 방면으로 통하는 중요한 출입구 구실을 하였으며 1975년부터 시작되어 1980년에 완공된 서울성곽의 일부로 1992년에 복원하였습니다

 

 

 

 

 

 

무지개 모양의 천장에는 봉황을 그려 이 일대를 새들의 피해로부터 보호하고자 했다는 말이 전해오기도 합니다

 

 

 

 

[딩동댕 골든벨은 누가 울리나]

 

마닐라삼으로 만든 독특한 가방을 기념품으로 받고 드디어 딩동댕 골든벨 시간이 돌아왔습니다

참가자들의 실력이 일취월장하여 세르파님 문제가 또 바닥나고 말았습니다...ㅎㅎ

결국 삼천만의 단판승부 가위바위보로 최종 승자를 가리게 됩니다만 역시 아이들을 먼저 배려하는 어른들의 따뜻한 사랑이 느껴지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작은 정성으로 서로 나누고 이해하고 사랑하기때문에 역사문화 탐방을 자주찾게 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저도 이렇게 사랑합니다...♥♡♥

 

 

 

한마디의 해설이라도 놓칠세라 진지하게 듣는 모습과 비장한 표정입니다...ㅎㅎ

 

 

 

 

 

 

[북악산 탐방을 마치며]

 

조선시대 한양도성 북악산 코스를 탐방하면서 역사를 되돌아보며 국가안보에 대한 중요성도 함께 느낀 하루였습니다

대한민국 수도경비와 청와대를 보호하기 위하여 40년간 통제되었던 이 코스가 개방된것은 2006년도입니다

지금도 삼엄한 경계속에 사진촬영 제한 등으로 다소불편한 점은 있지만 한양도성을 한바퀴 돌아서 순성할수 있도록 이곳까지 연결되어 있는것에 감사해야 할 일인것 같습니다

숙정문 앞에 뜬금없이 서있는 사슴형상과 저만치 옮겨 앉은 혜화문과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소의문과 돈의문 그리고 서울왕돈가스 근처에서 뚝 끊어진 성곽길에서 길을 잃고 두번째로 헤매다가 시멘트로 짖눌린 성곽을 바라보면서 참 많은것을 생각하게 한 하루이기도 하였습니다

 

한가위 특집으로 마련한 북악산 트레킹에 참석하고 싶어 고향찾아 떠났다가 먼길 달려와 함께 할 수 있어 즐겁고 행복했습니다

 

금번 역사문화 탐방을 진행해 주신 이천관 세르파님과 함께 선두와 후미에서 지원해 주신 전종현. 김대성 세르파님께도 감사드립니다

 

함께 하신 여러분 수고 많으셨습니다

 

여러분 사랑합니다

 

항상 부족하지만 제 카메라로 담아온 여러분 인물사진은 마운틴북>스토리>갤러리에도 올려놓았습니다

 

2015.9.28(월)

 

풍경소리 이규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