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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킹/산성탐방

[역사문화탐방]한양 낙산과 이화동 벽화마을 이야기

by 풍경감각 2015. 6. 6.

 

<주제 : 역사문화탐방 '한양 낙산, 옛 이야기속으로'>

 

 

♡ 일시 : 2015.6.6(토. 현충일)

 

♡ 코스 : 동대문(흥인지문) ~ 도성박물관 ~ 한양도성/낙산공원 ~ 비우당 ~ 이화동벽화마을 ~ 동대문(흥인지문)

 

♡ 누구랑 : 블랙야크 마운틴북 '역사문화탐방단' 35명과 함께

 

 

 

전종현세르파님과 함께 하는 역사문화탐방 트래킹....

 

 

 

이번에는 서울도성(都城)의 동쪽 좌청룡(左靑龍)에 해당하는 '낙산성곽' 과 '이화동 벽화마을' 에서 실시하였다

 

 

 

 

 

 

 

 태조는 조선 건국초기인 1394년 한양으로 천도한뒤 가장 먼저 종묘, 사직, 궁궐을 건설하고

 

 1395년 도성건설을 위한 도성축조도감(都城築造都監)을 설치하고 우선 정도전을 시켜 한양의 산세를 살펴보고

 

 백악산/북악산(북현무, 北玄武)을 중심으로 동으로 낙산(좌청룡,左靑龍), 서로 인왕산(우백호, 右白虎), 남으로 목멱산/남산(남주작, 南朱雀)이

 

서울을 에워싼 내사산(內四山)을 잇는 약19km에 이르는 성터를 확정짓고 이듬해 도성축조에 착수를 한다 

 

 

그래서 이때 무학대사와 정도전이 대립하게 되고...

 

 

 

 

사실 낙산은 도성의 동쪽에 위치한 좌청룡(左靑龍)의 기상을 가지면서도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은 산으로

 낙산공원의 몽마르뜨 언덕은 아쉽게도 아베크족들의 서울시내 야경을 구경하는 최적지 정도로 여겨지고 있는듯하다

  

 

 

 

낙산은 낙타의 등처럼 생겼다고 해서 '낙타산'이라 하다가 '낙산'이 되었고 낙산은 지금은 정상 근처까지 아파트와 집들이 들어서

 산인지 언덕인지 구분도 안 되지만, 조선시대에는 풍수지리상 도성의 ‘좌청룡(左靑龍)’에 해당하는 매우 중요한 산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문제는 낙산이 인왕산에 비해 너무 낮고 산줄기도 짧은데 있었고

인왕산의 높이 338m에 비해 낙산은 125m에 불과하고 너무 낮아 균형이 맞지 않았던 것이다

  

 

 

일명 풍수대가들의 이야기를 빌어보면

우백호(右白虎)인 인왕산은 여성, 지차(之次: 둘째 아들 이하)를 의미하고,

좌청룡(左靑龍)인 낙산은 남성, 장자를 의미하는데,

좌청룡이 형편없으니 보나마나 왕자, 장자가 귀하고 힘을 못 쓸 것이 너무 뻔하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조선27대 왕들중에서 장자가 왕위를 계승한것은 7명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니 믿어볼만한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낙산 아래 동대문도 지대가 낮아 돌을 깔고 문루를 올리느라 다른 세 대문보다 두 배의 공력이 들었고 공사 또한 늦어지고

 동대문에 지(之)자를 넣어 기운을 보강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때 무학대사와 정도전이 대립하게 되고...

 

즉 무학대사는 궁궐의 자리를 인왕산 밑에 잡아 궁궐이 동(東)쪽을 보게 하자고 주장한다

그래야 북악이 좌청룡이 되고, 목멱(남산)이 우백호가 되어 좌청룡이 든든해지니 왕자, 장자가 힘을 얻어 조선의 왕권이 강화된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삼봉 정도전은 임금의 자리는 남면(南面: 임금은 남쪽을 보고 앉는 것이 제 자리라는 유학의 기본 개념)하는 것인데

 어찌 동쪽을 보고 앉으신단 말이냐고 강력 반대했다는 것이다

 

결국 삼봉의 승리로 끝나고, 경복궁은 북악산 밑에 지어지고 임금은 남면(南面)하게 되었다.

 

 

 

이때 무학대사가 통탄하며 '200년이 지나면 종묘사직이 흔들리는 크나큰 재앙을 만날 것'이라고 예언했다는 점사(占辭)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아마도 조선 건국 1392년에서 2백년이 지난 시점에 일어난 임진왜란(1592년)을 두고 누군가 가져다 붙인 이야기는 아닐까 싶다

 

 

 

 

 

 

<한양 도성  탐방 이야기>

 

최근 유행하고 있는 '메르스(Middle East Respiratory Syndrome)'공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름대로 손소독제를 챙기고 마스크까지 착용하고 일찌감치 지하철로 이동하여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에 내렸다

 

웅장한 규모의 동대문 디자인센터를 가로질러 큰길로 나오니 동대문 쇼핑의 메카 동대문시장과 멀리 동대문이 보인다

 

당시 동대문야구장의 고교야구 전설들을 잠시 생각하며

서울시티투어 안내소에 들러 팜프렛도 몇장 얻고 청계천을 건너 모임장소로 이동한다

 

 

 

 

 

 

 

 

 

 

 

 

 

 


옹성으로 구축된 동대문에서 출발....

 

좌청룡인 낙산이 그 지세가 약하여 풍수지리적인 비보책을 많이 썼는데 그 중에 하나가 낙산의 지세를 연장하기 위해

 

한양의 사대문 글씨가 모두 세 글자인데 흥인지문(興仁之門)은 산맥을 연상케 하는 '갈 지(之)자'를 고종때 한자 더 추가하였을 뿐만 아니라

 

지대가 낮고 외세의 침입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하여 다른 사대문에서는 볼 수 없는 '옹성'을 구축하였다고 한다

 

 

 

재니 있는 이야기는 여러번 증개축을 하면서 수축과 팽창이 다른 나무를 사용하여 계절에 따라 성이 한쪽으로 미세하게 기울어지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사실을 몰랐을때는 줄로 옆건물에 연결하여 지탱을 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 분은 두툼하게 복사해온 자료를 읽어보며 미리 예습도 하고 탐방 준비를 합니다만...ㅎㅎ

 

 

 

 

 

서로 인사를 나누고 열띤 해설에 들어갔는데 때마침 현충일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 사이렌이 울립니다

 

 

 

 

 

 

 

 

 

 

 

 

왜 동대문은 흥인문(興仁門)으로 하지 않고 흥인지문(興仁之門)으로 했을까요?

 

 

서울의 사대문(四大門) 이름은 숙정문, 숭례문, 돈의문, 흥인지문인데 무엇 때문에 동대문만 흥인문(興仁門)으로 하지 않고 '흥인지문(興仁之門)'한 이유는

좌청룡인 낙산의 지세가 약하니 지(之) 자(字)를 넣어 늘려 주는 비보(裨補)를 한 것이라고 한다 

 

 

 

 

 

흥인문과 숭례문, 광희문에는 '용'이 그려져 있고 창의문 혜화문은 '봉황'이 그려져 있다고 한다

 

 

 

 

 

 

 

 

 

 

이자리에 1892년에 설립된 '동대문교회'의 천막이라고 한다

아쉽게도 오래되었지만 많은 증개축이 이루어져 역사적으로 보존할만한 가치가 훼손되어 철거이전되었다고 한다

 

 

 

 

 

 

 

 

 

도성박물관으로 행하는 길가에 금계국이 노랗게 피어있습니다

 

 

 

 

 

세르파님께서 올려주신 글에 의하면 '1892년 동대문 북편에 '보구여관 분원'이 설치됩니다.

1910년 동대문 분원을 증축해 '동대문 부인병원(정식명: 해리스기념병원)'이 되고, 1945년 해방후 동대문 부인병원은 '이대부속병원'으로 바뀌게 됩니다.

 1980년대 이후 적자에 시달리던 '이대 부속 동대문병원'은 2010년 서울시에 매각이 되어 목동으로 이전을 하고 지금은 '동대문성곽공원'이 되었습니다.

 병원신관은 리모델링을 끝내고 현재 '동대문 성곽박물관'으로 개장을 했습니다' 라고 적혀있다

 

 

 

낙산 구간 탐방로 시작점에 위치한 한양 도성박물관은

상설전시실, 기획전시실, 도성정보센터와 학습실을 갖춘 문화공간이다

 

한양 도성박물관의 관람시간은 평일은 09:00 ~ 19:00 주말, 공휴일은 09:00 ~ 19:00 (3~10월)09:00 ~ 18:00 (11~2월)이라고 한다

 

 

 

 

 

 

 

 

 

 

 

 

 

성곽을 쌓을때 사용되었던 '성석'이라고 한다

 

 

 

 

 

'레고 숭례문'은 기획과 설계, 제작에 3개월의 시간이 소요되었으며 30여만 개의 블록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낙산공원에서 바라본 풍광....

 

 

멀리 좌측으로 인왕산은 右白虎의 모습으로 우측으로 북악산은 한양의 주산으로 늠름해 보인 반면 우리가 서있는 이곳 낙산은 너무 약해 보인다.

 

 

저산이 청와대 뒷산으로 북악산이다

 

북악산은 높이 342m의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서울의 주산(主山)이다.

서쪽의 인왕산(仁王山, 338m),남쪽의 남산(南山, 262m), 동쪽의 낙산(駱山, 125m, 낙산공원이 있는 산)과 함께

서울의 사산(四山) 중 하나로, 북쪽의 산으로 일컬어왔다

 

 

 

 

 

 

 

 

 

 

 

 

 

 

자세히 보면, 성곽의 돌의 색깔과 모양으로 시대구분을 할 수 있다

검은색 돌의 크기나 모양이 둥글납작하게 제각각인 곳은 조선 초기에 축성한 것이고,

그보다 조금 큰 장방형의 반듯한 돌로 이뤄진 곳은 조선 중기 숙종 이후 보수한 것이고

하얀색 여장과 새성돌은 1990년대 들어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성석을 움직이기 위한 홈이 파여있고 곳곳에는 동원된 인부들의 지명과 이름 등이 각자되어 있어 책임구역을 정하여 성을 쌓았음을 알수 있었다

 

 

 

 

 

 

 

 

조선 초 도읍을 정하면서 동서남북 네 산을 이어 도성을 빙 둘러 성곽을 쌓고, 4개의 대문과 4개의 소문을 세웠다

 

 

4대문은 숭례문(崇禮門. 남대문), 숙정문(肅靖門. 북대문), 흥인지문(興仁之門. 동대문), 돈의문(敦義門. 서대문)이며

 

4소문은 혜화문(惠化門. 동소문), 광희문(光熙門. 남소문 또는 水口門), 소의문(昭義門. 서소문), 창의문(彰義門. 북소문)이다 

 

 

 

 

 

 

 

암문은 비상용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성안과 밖을 연결하는 통로로서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낙산공원 인증샷....ㅎㅎㅎ

 

 

 

비우당(庇雨堂)과 자주동샘(자지동천.紫芝洞泉) 그리고 이수광(李晬光)의 지봉유설(芝峰類說)...

 

우리나라 최초 백과사전으로 여겨지는 '지봉유설(芝峰類說)'의 저자 이수광이 외조부의 집을 손질하여

 '겨우 비만 가릴 수 있는 집'이라는 뜻으로 당호를 붙인 비우당이다

 

경순왕후가 정업원에 있을때 천에 염색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었는데 단종이 영월(寧越) 청령포(淸泠浦)에서 귀양살이할 때

입을 저고리깃·댕기 등을 빨면 자줏빛으로 물이 들었다고 하여 자주동샘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화동(梨花洞) 벽화마을'입니다

 

 

이화동은 낙산공원아래 조그만 마을로 당시 소외된 지역의 시각적 환경을 개선하고자 60여명의 예술가들이

 동네 곳곳에 그림을 그리고 조형물을 만들어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찾는 명소가 되었습니다

 

사실 '이화정'을 방문하기로 했으나 벽화마을 돌아다니다가 시간이 많이 흘렀고 일행을 놓친데다가

오늘은 문을 열지않는다는 주차장 아저씨의 이야기를 듣고 다시 성곽을 따라 동대문으로 나옵니다 

 

 

 

 

 

 

 

 

 

 

 

 

 

여기 팔각정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아마츄어 모델 사진 콘테스' 를 병행하기도 했지요

 

 

 

 

 

 

 

 

 

 

 

 

 

 

 

 

 

 

 

 

 

 

 

 

 

 

 

 

 

 

 

 

 

 

 

 

 

 

 

한쪽 날개가 짤렸습니다...ㅎㅎㅎ

 

 

 

 

 

 

 

 

 

 

 

 

 

 

 

 

 

 

 

안녕~ 다음에 또만나요....

 

2015.6.6

 

풍경소리 찍고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