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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킹/산성탐방

서울 한양도성(漢陽都城) 달빛 트레킹

by 풍경감각 2015. 7. 25.

서울 한양도성 역사탐방 달빛 트레킹 참가기]

 

♡ 탐방 테마 : 이천관 세르파님과 함께 하는《해설이 있는 성곽길 달빛 트레킹》[서울 한양도성] 가족과 함께 한양의 울타리를 걷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중구

♡ 탐방 일자 : 2015년 7월 25일 (토) 16:30~22:30

♡ 집결지 : 원래 도성박물관에서 16:30 집결하기로 했으나 오전부터 개인적으로 창덕궁 후원 관람으로 늦어져 바로 흥인지문 옹성 앞에서 17:20에 참가함

♡ 탐방 코스 : 한양도성박물관(상설 전문해설) → 흥인지문(동대문, 해설) → 오간수문지(해설) → 이간수문(해설) → 광희문(해설) → 신당동성곽길/타워호텔 → 남소문터→ 국립극장 → 남산 성곽길 → 팔각정/목멱산/봉수대 해설/골든벨 퀴즈(공식행사종료) → 잠두봉 야경 → 숭례문(남대문, 해설)

♡ 탐방 시간 : 탐방 3시간 + 해설 3시간, 총 6시간 소요

♡ 날씨 : 비오고 흐림(흥인지문에서 시작할때는 비가 많이오고 신당동 성곽길 근처부터는 비가 소강상태였으나 남산은 짙은 안개로 남산N타워는 2층 정도만 보이고 서울시내 야경은 희미하게 보일 정도였음)

 

 

한양도성(漢陽都城)이란?

 

서울 한양도성(漢陽都城 ; Seoul city wall)은 조선의 도읍인 한성부의 경계를 표시하고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성이다. 조선을 건국(1392년)한 태조 이성계는 1394년 10월 도읍을 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기면서 태조의 명에 의해 정도전이 내사산[內四山 : 백악산, 낙산, 목멱산(남산), 인왕산]을 잇는 총 연장 59,500척(尺) 즉 약19km에 이르는 성터를 확정하고 전국에서 11만8070명을 동원하여 1396년 1월 9일~ 2월 28일까지 49일간에 걸쳐 축성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태조 때 쌓여진 성곽(토성과 석성)이 절반 가까이 무너지자 세종은 1422년 1월15일부터 2월23일까지 38일간 공사로 토성은 모두 헐고 석성으로 고쳐 쌓는다. 숙종때에 와서 다시 축성론(성을 다시 쌓자는 논리)이 대두되어 5군영(五軍營)인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 등 삼군문(軍門)에 명하여 도성을 수축하게 된다. 전체 길이 18.627km에 이르는 한양도성은 현존하는 수도의 도성 가운데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랫동안 도성의 기능을 수행했다. 탐방을 하면서 흥미로운것은 세시기에 쌓은 도성의 축조방법과 돌의 모양이 작은돌과 메주덩어리, 사각형/장방형 등으로 제각각 달라 쉽게 구분할수가 있다는 것이다.

 

 


 

서울도성에는 8개의 문을 두었는데 현재 6개가 남아 있으며 돈의문(서대문)과 서소문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4대문[四大門 :숭례문(남), 흥인지문(동), 돈의문(서), 숙정문(북)]과 4소문 [四小門 : 혜화문(북동), 광희문(남동), 서소문(남서), 창의문(북서)]을 두었으며 오늘은 일명 수구문(水口門)이라고 하는 광희문(光熙門)을 탐방하였다.

 

또한 도성안에서 밖으로 물을 빼내기 위한 수문을 두었는데 지대가 낮은 흥인지문과 광희문 사이에 오간수문과 이간수문을 두었는데 이곳도 탐방을 하였다(빨간색 표시가 오늘 탐방 코스임)

 

 

도성(都城)박물관

 

이대동대문병원을 목동으로 이전하고 그 자리에 세운 도성박물관으로 전문 해설가가 상주하며 도성의 연혁과 성석의 구조와 종류 등 다양한 지식과 정보를 보고 느끼고 감상할수 있는곳이다. 여기서 위로 올라가면 낙산성곽으로 이어지고 아래로 나려가면 흥인지문 탐방 코스로 이어진다. (창고사진)

 

 

 

흥인지문 (興仁之門)

 

흥인지문은 동대문이라고도 부르는데 흥인지문(興仁之門)을 흥인문(興仁門)이라 하지 않고 '갈지(之)' 자를 넣은 것은 법궁 경복궁을 기점으로 하여 좌청룡 우백호의 지세(地勢)가 서로 걸맞게 흘러내려야 하는데 우백호에 해당하는 낙산 줄기가 좌청룡에 해당하는 인왕산에 비하여 약하였으므로 낙산의 지세를 연장하기 위하여 산맥을 연상케 하는 '갈 지(之)자'를 고종때 한자 더 추가하였다고 한다. (창고사진)

 

 

또한 바깥쪽으로는 성문을 보호하고 튼튼히 지키기 위하여 도성의 8개 성문 중 유일하게 반원 모양의 옹성(甕城)을 구축하였다. 이는 지리적으로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기 때문에 군사적으로는 동대문이 가장 취약하여 외세의 침입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고 적을 공격하기에 적절하게 옹성을 구축하였고 조선후기 건축양식을 잘나타내고 있다.

 

 

 

 

제법 굵어진 빗방울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단체사진도 찍고 인증을 하며 세르파님의 해설을 진지하게 듣는 블랙야크 역사문화탐방객들의 열정이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오간수문지'와 '이간수문'

 

흥인지문과 광희문 사이에는 오간수문과 이간수문이 있었는데 이 부근은 서울에서 가장 지대가 낮아서 내사산에서 내려온 물이 모두 이곳을 거쳐 도성 밖으로 흘러나갔고 성벽이 청계천을 만나는 위치에는 수문들이 이어져 있었다. 오간수문은 수문이 5칸, 즉 5개의 수문으로 이루어졌다는 뜻에서 붙은 이름이다.

 

 

물이 원활하게 흘러갈 수 있도록 아치형으로 된 5개의 구멍을 만들어 홍예교라고도 하였고 홍예 위에 성곽을 쌓아 올렸으며, 아치 모양의 구멍을 서로 연결하여 성벽 안쪽으로 장대석을 연결하여 다리를 놓았다. 사람들이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도록 수문마다 쇠창살로 만든 철문을 설치하였다. 각 수문의 크기는 1.5m 정도이다.

 

재미 있는 사실은 이 수문이 도성 안에서 죄를 지은 자가 도성을 빠져나가거나 혹은 몰래 도성 안으로 잠입하는 사람들의 통로로 곧잘 이용되었다는데 실제로 명종 때 전국적으로 사회를 흉흉하게 만들었던 임꺽정의 무리들이 도성에 들어와 전옥서(典獄署)를 부수고 도망갈 때에도 이 오간수문을 통해 달아났다고 한다.

 

 

 

1970년 당시 봉제공장 재단사로 근로기준법 개선을 요구하며 분신자살한 전태일 열사 기념비가 근처에 있는 동대문 평화시장을 가로질러 흐르는 청계천 다리 상판 아래에 추정 재현되어 표시만 되어 있는 '오간수문지'를 탐방한다.

 

 

 

1907년 일제가 청계천 물이 잘 흘러가게 한다는 명목으로 오간수문을 모두 헐어버리고 이듬해 3월에는 동대문 근처의 성벽과 함께 오간수문의 성벽마저 헐었다. 대신 같은 자리에 콘크리트로 만든 다리를 세웠는데, 오간수문을 오간수다리·오간수교·오간수문교로 부르게 된 것은 이때부터이다

 

 

오간수교는 1926년 다시 확장.건설되었으나, 1950년대 말부터 시작된 청계천 복개공사로 완전히 없어졌다가  2003년 7월부터 청계천복원사업의 일환으로 청계천 역사유적을 발굴할 때 오간수문의 아래쪽 끝받침과 홍예(虹霓:무지개 모양의 구조물) 기초부, 돌거북 등이 발굴됨에 따라 2004년부터 복원사업을 추진하였다. 새롭게 만들어진 오간수교는 오간수문의 전통적인 모양을 살려 5개 수문과 무지개 모양의 홍예 아치를 재현하였다

 

▽ 동대문 DDP프라자 디자인 센터를 지나 이간수문으로 향한다

 

 

 

이간수문

 

동대문운동장 관중석 밑에 매몰되어 있다가 발굴된 이간수문은 원형에 가까운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당시 철거 과정에서 땅 속에 묻혀 있던 성벽의 일부와 이간수문(남산에서 발원한 물이 도성 밖으로 빠져나가는 두 칸짜리 수문), 치성(雉城 · 성벽의 일부를 돌출시켜 적을 방어하기 위한 시설물), 하도감으로 추정되는 건물 유구 등이 대거 모습을 드러냈다. 현재 이간수문은 원 자리에 있으나 동대문디자인플라자 자리에 있던 건물 유구는 공원 안으로 옮겨졌다. 이 자리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동대문역사문화공원 내 동대문역사관에서 볼 수 있다.

 

 

 

 

 

 

 

 

 

 

 

 

 

동대문운동장

 

1925년 일제는 일본 왕세자 결혼 기념으로 이곳에 경성운동장을 지었는데, 성벽을 이용하여 관중석을 만들었다. 경성운동장은 해방 후 서울운동장으로 개칭되었다가 ‘88올림픽(제24회 서울올림픽)’ 이후 다시 동대문운동장이 되었다. 근현대 한국 스포츠의 중심지였던 이 운동장이 헐린 것은 2007년이다. 동대문운동장은 '호므런'으로 불리던 전국고교야구와 한국 축구의 역사를 새롭게 써가며 흑백TV와 라디오 중계방송의 아련한 추억을 만들어갔던 시절도 있었다. 지금도 그 시절 야간경기에 사용하던 조명탑 2개를 기념으로 남겨 두었다.

 

 

 

광희문

 

도성 밖 이 지역은 당시 중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고 대장간이 많이 있었는데 그러한 이유로 철공소와 유명한 공업고등학교 등이 발전한 지역이라고 하는데 맞는지 자료를 찾아 보아야 하겠다. 광희문은 한양도성의 동남쪽에 있는 문으로 오간수문, 이간수문이 주변에 있어 일명 '수구문(水口門)'이라고도 하며, 도성에서 죽은 사람의 장례행렬이 이 문을 통하여 나갔으므로 '시구문(屍口門)'이라고도 하였다. 북한산성 13성문 종주시 효자리에서 올라가다 만나는 시구문과 같다. 일제강점기에 일부 무너지고 1960년대에 퇴계로를 내면서 반쯤 헐렸던 것을 1975년 원 위치에서 남쪽으로 15m 떨어진 현 위치에 중건하였다.

 

 

 

 

 

 

 

 

 

광희문 상단에는 청룡이 그려져 있다

 

 

신당동 성곽길

 

광희문 바깥의 마을로 광희문은 시체가 나가던 시구문으로 문 밖은 노제 장소였기 때문에 무당집들이 많아 신당리(神堂里)로 불렸는데, 갑오개혁 이후 신당리(新堂里)로 바뀌었다. 지금은 신당동 허리케인박(ㅎ)과 떡볶이가 유명한 곳이 되었으니 알다가도 모를일이다. 또 하나 일반 백성들도 출입하기를 꺼리는 문이었으나 왕의 신분으로 이 문을 이용한 왕이 있었는데  인조는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 군사가 예상보다 빨리 도성에 접근하자 광희문을 통해 남한산성으로 급히 피신하였다고 한다

 

 

 

 

 

 

 

 ▽ 비가 내리는 아스팔트위에서 엄마와 아들간의 결투..

과연 누가 이겼을까요? 아마도 슈퍼마켓이 이겼겠지요...ㅎㅎㅎ

 

 

 

 

 강원도에서 여기까지 오신 김남석 세르파님 부부께서 역사문화 탐방 성곽길을 함께 걷고 있는 뒷모습입니다

 

 

이곳 암문을 통과하여 안쪽으로 트레킹을 할수 있습니다

이곳은 주택가이므로 정숙을 요하는 구간들입니다

 

 

 

 

 

 

 

 

이곳 트레킹 코스에서  전망이 가장 뛰어나다는 우수 조망처 성곽마루입니다

그러나 안개가 끼어 남산도 흐릿하게 보이고 몇몇 조명 불빛만 허공을 쏘아 붙이고 있습니다

 

 

 

 

 

 

 

장충체육관은 저 아래에 있으나 성곽길을 따라 오느라고 이곳에서 설명으로 대신합니다

나준에 기회가 된다면 장충체육관과 안개낀 장충단 공원을 다시한번 들러보아야 하겠습니다

세르파님께서 프로레슬러 박치기왕 김일 선수의 경기와 통일주체국민회의 등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해주시니 어렴풋이 천규덕선수의 이중 날아차기와 아시아 농구 선수권대회 신동파 선수 등이 희미하게 생각나는것을 보니 나도 꽃중년인가요?..ㅎㅎ..

 

 

 

 

남소문터

남소문(南小門)은 1457년(세조 3년) 도성 안에서 광희문을 통해 한강으로 가는 길이 멀다는 이유로 새로 만든 문이다. 그러나 우마차도 다닐수 없을 정도로 산이 깊었고 풍수자리상 좋지 않다는 이유로 1469년(예종 원년)에 폐쇄하였다. 이후 문을 다시 개통하자는 의견이 여러 차례 나왔으나, 실현되지 않았고 일제강점기에 철거되었다. 반얀트리클럽&스파서울 호텔 뒷문 오른쪽 오르막길가에 조그맣게 남소문터 표석이 있을뿐이다.

 

 

국립극장

1973년 장충동에 건립된 국립 공연 · 예술 종합극장이다. 1974년 광복절 경축식 행사 도중 문세광에게 육영수 여사가 저격당한 장소이기도 하다. 해오름극장(대극장), 달오름극장(소극장), 별오름극장, 하늘극장(원형 야외무대) 등이 있다.

 

 

 

 

 

이것은 거북이 마라톤행사가 열리는 주로이며 나도 몇년전에는 가끔 언덕훈련을 할때 이용하던 마라톤코스중의 하나였다

이봉주나 황영주 선수처럼 빤쑤 한장 달랑 입고 언덕훈련을 한답시고 이리저리 뛰어 다니던 때가 생각납니다

 

 

남산 동쪽 성곽길

 

남산순환버스 정류장을 지나 우측 나무 계단을 이용하여 올라가면 태조 때 성벽이 길게 이어져 있다. 태조 시기의 성벽은 축성된지 이미 600여 년이나 지났지만 아직도 초축 당시의 메주덩리리 돌멩이 모습을 그대로 유지한 성벽이 상당 부분 남아 있다. 빗길에 운무가 앞을 가리고 습도까지 높아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들고 카메라마져 자꾸 김이 서려 뿌연해진다. 가파른 계단길을 20여분 올라가니 순환도로에 다다른다

 

 

 

 

성곽을 쌓은 돌모양이반듯하게 다듬어진  왼쪽과 작은돌과 메주덩어리같은 돌로 쌓은오른쪽 성곽이 뚜렷이 구분되지요

 

 

남산성곽길을 숨차게 올라와 잠깐 쉬면서 한컷....

 

 

히뿌연 밤안개 사이로 성곽도 희미하게 보이고 말 그대로 휘청거릴만한 몽환적인 분위기속에

 느티나무와  단풍나무 사이로 가로등 불빛이 신비하게 빛내림을 하고 있다

함께 가던 김현수세르파님 일행과 꼭 천지창조하듯 두 손을 높이 들어 오 주여.. .하는 모습으로 우스꽝스런 포즈를 취해 본다...ㅎㅎㅎ

아스팔트위에 비치는 빛그림자도 바람이 불때마다 마치 빙글빙글 돌아가는 나이트클럽의 사이키 조명처럼 환상적이다..^^..

 

 

 

스텝도 밟아보고...ㅎㅎㅎ

 

 

 

 

 

 

 

 

남산(목멱산, 해발 270m)은 한양이 조선의 도읍(都邑)으로 정해지면서 도성(都城)의 남쪽에 위치하는 산이라 '남산'이라고 불렀다.

 본래 이름은 '목멱산(木覓山)'인데, 목멱산이란 옛말의 '마뫼'로 곧 남산이란 뜻이다. 또 '인경산(引慶山)'이라고도 불렀다.

태조실록에 의하면 태조 재위 4년인 1395년 남산을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봉하고 이를 모시는 사당을 '목멱신사(木覓神祠)'라 하였다. 매년 나라에서 제사를 올리게 되자 목멱신사를 국태민안(國泰民安)을 비는 '국사당(國師堂)'이라고 불렀다.

 

 

 

 

 ▽ 남산 N타워 창고사진입니다

남산 정상에 우뚝 솟은 전망 탑으로 해발 480m 높이에서 360도 회전하면서 서울시 전역을 조망할 수 있는 명소이다. 1969년 수도권에 TV와 라디오 전파를 송출하는 종합 전파탑으로 세워졌다가 1980년부터 일반에 공개됐다. 이후 대대적인 보수를 거쳐 2005년 복합문화공간인 N서울타워로 재탄생하였다.

 

 

▽ 세르파님이 소개해 주신 회전식 고급 레스토랑 풍경입니다.

서울시내와 한강 야경을 구경하며 와인 한잔에 엘레강스하게 식사하면 한바퀴가 자동적으로 돌아가고...

이 사진은 몇년전 제가 직접 찍어온 사진입니다...ㅎㅎㅎ

 

 

 

남산 '팔각정' 자리는 조선시대 국사당(國師堂)이 있던 자리이다. 조선 태조는 남산을 목멱대왕으로 삼고 이 산에서는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기원하는 국가 제사만 지낼 수 있게 하였다. 1925년 일제가 남산에 조선신궁을 지으면서 인왕산 기슭에 옮겨졌다. 제1공화국 때에 원 국사당 자리에 탑골공원 팔각정과 같은 모양의 정자를 짓고 이승만 대통령의 호를 따 ‘우남정’이라고 하였는데, 4·19 혁명 이후 팔각정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여기서 골든벨 퀴즈대회를 실시했는데 소생은 이번에는 큰 맘먹고 첫문제 진위형에서 전략을 수정하여 O를 따라갔으나....

어김없이 첫판에서 깨끗이 물러나고 말았다

역사탐방 횟수가 거듭될수도록 도전자들의 실력이 일취월장되고 있어 일회전 탈락의 굴레는 당분간 계속될것 같은 예감이 든다

온 가족과 특히 아이들이 함께 문제도 풀고 웃고 떠들며 보낸 아름다운 시간들이다

 

 

 

이 상품들은 누가 타 갔을까요?

요즘 어린이들 우리 역사문화에 대한 실력들이 대단합니다...ㅎ

 

 

 

 

서울의 한가운데(서울의 중심점)는 어디일까요?

 위성항법장치(GPS)로 측량한 결과 서울의 지리적 중심점이 남산 정상부에 있음을 확인하였다.

 이 자리에는 서울의 중심점임을 표시하는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다.

정상부에는 탑골공원의 정자를 본뜬 팔각정(八角亭)과 N서울타워, 박물관, 레스토랑, 카페 등의 시설이 있고,

 산정부에 '한국의 경위도 원점(經緯度原點)'이 있다고 하는게 밤이 너무 늦어 찾아볼수가 없다

 

 

서울의 중심점은 어두워서 갈수가 없어 박상세르파님의 중심점을 몰래 카메라에 담아봤다...

듬직한 장단지와 대퇴사두근이 우리나라를 잘 지켜줄것 같지요...ㅎㅎ

 

 

 

 

 

 

 

 

남산의 정상에는 5개의 화구를 가진 목멱산 봉수대(烽燧臺)가 남아있다.

 남산은 예로부터 경치가 뛰어난 곳으로 여러 선비들이 거처했고 그들이 지은 누각이 곳곳에 있었지만 지금은 모두 사라지고 문헌의 기록으로만 남아있다고 한다.

 

 

목멱산 봉수대(烽燧臺)는 조선시대 전국팔도에서 올리는 봉수(烽燧)의 종착점이었다.

전국에 620야개소가 있었고 목멱산 5개소의 경봉수(京烽燧)를 최종 목적지로 편제되어 있었다.

봉수란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횃불로 변방의 정세를 알리는 시각(視覺) 신호를 말한다.

 

 

평시에는 1개의 봉수를 올렸으며, 변란이 생기면 위급한 정도에 따라 2개부터 5개까지 올렸다.

 목멱산 봉수대는 ‘태조3년(1394년)’ 세종 5년(1423)에 설치되어 고종 32년(1895년)까지 500여 년 간 존속하였다.

현재의 봉수대는 1993년에 추정 복원한 것이다.

 ▽ 창고사진

 

 

남산의 자랑거리인 사랑의 열쇠(창고사진)

사랑하는 연인들이 열쇠를 잠그고 키를 멀리 던져버리고 사랑를 맹세한다는 사랑의 열쇠...

주렁주렁 너무많이 매달려 무너질까 겁난다...

 

 

 

케이블카 타는곳 위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 풍경이다.(창고사진)

 

 

남산 서쪽 봉우리는 누에머리를 닮았다하여 예부터 '잠두봉'이라 불렸다.

이곳 잠두봉 전망대에 올라 내사산으로 둘러싸인 서울 시내 야경울 바라보면

너무 휘황찬란하여 황홀할정도로 기가 믹하다는데 오늘은 너무 흐려 조망이 별로다.

 

 

 

 

 

 

가파른 나무 계단길을 내려와 백범광장(白凡廣場)근처까지 왔으나

 앞서 간 일행을 놓치고 너무 한적하여 안중근의사 동상만 잠깐 보고 남대문시장방향으로 향한다.

 

백범광장은 일제강점기에 조선신궁이 있던 곳으로, 일제 식민지배의 상징을 항일 독립운동의 상징으로 대체한 곳으로 백범 김구 선생 동상, 성재 이시영 선생 동상, 안중근 의사 기념관과 동상 등 항일 독립운동가를 기리는 기념물이 많다고 하는데 다음으로 미루어야 하겠다

 

숭례문(남대문)은 조선시대 서울도성을 둘러싸고 있던 성곽의 정문으로 원래 이름은 숭례문이며, 남쪽에 있다고 해서 남대문이라고도 불렀다.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태조 5년(1396)에 짓기 시작하여 태조 7년(1398)에 완성하였다. 이후, 2008년 2월 10일 어느 노파의 숭례문 방화 화재로 안타깝게도 누각 2층 지붕이 붕괴되고 1층 지붕도 일부 소실되는 등 큰 피해를 입었으며, 5년 2개월에 걸친 복원공사 끝에 2013년 5월 4일 준공되어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밤은 깊어 인적도 드물고 지하철 마감 시간이 다가와  남대문 시장을 가로질러 종종걸음을 치며 회현역으로 달려간다.

 

 

오백년 도읍지를 감싸고 있는 한양도성의 빛과 그림자를 찾아 나선 달빛 트레킹..

비록 날씨는 흐리고 비까지 내려 탐방하기에 다소 어려움이 있었지만 한여름밤 블랙야크 가족들과 함께 삼삼오오 모여 성곽길을 걸었던 기억들이 오래 남을것 같다

 

올해는 광복 7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이다

 

우리의 역사와 현재를 연결시켜주고 새로운 역사를 창조해 나가는 한양도성길에도 태극기 물결이 넘쳐 흐르고

소중한 역사와 문화를 올바로 이해하고 더욱 계승발전켜 나갔으면 좋겠다

 

밤 늦게까지 달빛 트레킹을 진행해 주신 이천관 세르파님과 끝까지 함께 해주신 여러 세르파님과 도전단 여러번 수고 많으셨습니다

 

2015.7.25

풍경소리 이규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