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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킹/산성탐방

한양도성 역사문화 탐방 및 순성하기

by 풍경감각 2016. 5. 21.



한양도성 걸어서 한바퀴...

오늘은 순성가세...

 

이천관 셰르파님이 진행하는 블랙야크 역사문화 탐방단과 함께...


♡ 일시 : 2016.5.21(토)

 

조선시대 과거시험을 보러 온 지방 유생들은 장원급제를 기원하며 해가 뜰때부터 해가 질때까지 도성을 한바퀴씩 돌아보고 했다.

인왕산 등 내사산과 도성을 한바퀴 순성하면서 그 당시 선비들은 궁궐을 바라보며 장원급제의 꿈을 다졌다고 한다

 

도성돌기는 과거 시험을 보러 오는 유생들에 의해 처음 시작되었지만 그후 일반사람들에게까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 이후부터 사람들은 봄과 여름이 되면 짝을 지어 삼삼오오 도성을 한바퀴 돌며 성 안팎의 풍경을 구경하게 되었고

이렇게 도성을 한바퀴 도는 산책은 '순성놀이' 라는 이름의 전통놀이로 자리를 잡게 된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며 도성 곳곳이 헐리고 사라져서 순성놀이의 전통도 끊어졌다고 한다.

 

근래에는 끊겨진 성곽들이 70%이상 복원되고 북악산까지 개방되면서 유카스코 등재에정이라는 입소문을 타고 순성을 하는 탐방객들도 늘어나고 있다.

 

블랙야크 도전단들과 함께 '달빛 아래 순성놀이'와' 낙산과 북악산 트레킹', '정동길 걷기'등 코스별로 나누어 한양도성 순성놀이를 해 보았고 

금년초 신년을 맞이하면서 1월10일에 친구들과 순성을 한 이후 올해는 두번째 순성놀이다



[한양도성(漢陽都城)이란?]

 

서울 한양도성(漢陽都城 ; Seoul city wall)은 조선의 도읍지인 한성부의 경계를 표시하고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성이다.

 조선을 건국(1392년)한 태조 이성계는 1394년 10월 도읍을 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기면서 태조의 명에 의해 정도전이 한양을 둘러싸고 있는

 '내사산(內四山)' 즉 백악산,낙산,인왕산,목멱산(남산)의 등줄기를 성으로 이은 것이 '한양도성(漢陽都城)'이고

1396년(태조 5)에 총 연장 59,500척(尺) 즉 약18.2km에 이르는 성터를 확정하고

 전국에서 11만8070명을 동원하여 1396년 1월 9일~ 2월 28일까지 49일간에 걸쳐 축성을 하게 된다.

그 이 후 세종과 숙종때 대대적인 성곽보강이 이루어졌고 일제강점기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양도성 너머 사방 10리까지를 성저십리(城底十里)라고 하는데 현재 서울 경계와 비슷하며

성저십리 밖에는 '외사산(外四山)' 이라 하여 북한산, 아차산, 덕양산, 관악산 이 한양을 둘러싸고 있다.

 

<올초 자료사진>


  


 


숭례문에서 돈의문터까지...


 

[사대문(四大門)과 사소문(四小門]

 

한양도성은 원래 명칭은 '서울 성곽'이었으나 2011년 7월 사적의 통일된 지정명칭 부여 사업의 일환으로 '한양도성'으로 변경되었고 총 길이는 약 18.2㎞이며

동쪽에는 낙산 트레킹때 보았던 흥인지문(興仁之門;동대문), 서쪽에는 돈의문(敦義門;서대문), 남쪽에는 숭례문(崇禮門;남대문), 북쪽 숙청문(肅淸門/숙정문으로 변경;북대문)의 사대문(四大門)과 그 중간중간에 북동쪽 홍화문(弘化門/혜화문), 남동쪽 광희문(光熙門), 북서쪽 창의문(彰義門/자하문), 남서쪽 소덕문(昭德門/소의문/서소문)의 사소문(四小門)을 내게 됩니다

 

 이 가운데 흥인지문만은 지세가 약한 동쪽을 보강하기 위하여 옹성을 쌓았고 숙청문(숙정문)은 암문(暗門)으로 하여 문루를 세우지 않았으며

 남대문은 1396년, 동대문 옹성은 1399년 완성되었지요





조선 초 도읍을 정하면서 동서남북 네 산을 이어 도성을 빙 둘러 성곽을 쌓고, 4개의 대문과 4개의 소문을 세웠다

 4대문은 숭례문(崇禮門. 남대문), 숙정문(肅靖門. 북대문), 흥인지문(興仁之門. 동대문), 돈의문(敦義門. 서대문)이며

4소문은 혜화문(惠化門. 동소문), 광희문(光熙門. 남소문 또는 水口門), 소의문(昭義門. 서소문), 창의문(彰義門. 북소문)이다 

 




▽ 남지터


경복궁에서 마주보이는 관악산이 화기를 품은 산이라고 하여 광화문 정문에 해태상을 세우고 숭례문 현판을 세로로 달고 그 앞에 남지라는 연못을 파서

푼수지리상 화기를 억눌렀다고 하지요





▽ 소덕문터



전동 근대화 거리에 있는 배재학당, 정동제일교회,이화학당,구러시아공관,중명전,정동극장,덕수궁돌담길 등 구한말 대한제국 시절의 역사의 현장을 지나갑니다












▽ 돈의문터




[ 우백호 인왕산 코스 : 경교장~홍난파선생가옥~인왕산~윤동주문학관~창의문]

 

▽ 경교장 출발 모습

 

'경교장'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을 지낸 백범 김구선생이 집무실과 숙소로 사용하였던 역사적 장소로

1949년 6월 26일 김구선생이 집무실에서 안두희(安斗熙)의 흉탄에 의해 서거하신 곳이기도 하다.

강북삼성병원 응급실 입구 보안실에서 한양도성 안내도 및 스탬프 완주인증을 받을수 있다

 




▽ 가고파 홍난파 선생 가옥

 

홍파동 가옥은 1930년에 독일 선교사가 지은  기와를 얹은 벽돌조 서양식 건물로 작곡가 홍난파 선생(1898~1941)이 인수하여 6년간 말년을 보낸 집이다.

 ′봉선화′, ′고향의 봄′ 등을 작곡한 홍난파 선생의 체취를 느낄 수 있는 이 주택은 1930년대 서양식 주택 특성이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어 

근대문화유산으로 가치가 크며 성곽만 따라가다보면 놓칠수 있는 곳이다.

 



▽ 지금은 편의점으로 바뀌었지만 한양도성을 순성할때 '옥경이 슈퍼'로 유명해진 이곳에서 용무를 보고 본격적인 인왕산 성곽길로 올라간다

 


▽ 오늘 여기까지 공식적으로 안내를 하고 이제부터는 각자도생을 하라고 하신다...ㅠㅠ

날씨는 5월 폭염주의보로 후끈 달아오르고 20여km를 갈수 있을지 모르겠다

후미를 책임지라는 선생님 말씀을 듣고 천천히 올라간다




▽ 인왕산(仁王山) 호랑이

 

서울을 굽어보고 있는 '인왕산 호랑이'는 예로부터 평민은 감히 범접할수 없는 대단히 무서운 것을 비유하는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를 들면 '한양이 무섭다고 하니 과천부터 벌벌 긴다' 라는 말도 있듯이 인왕산이 왕을 노려보는 형국이라서 그러하지 않았을까 한다

지금은 카메라 각도만 그곳으로 들이대지 않으면 올라가서 한양을 굽어볼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세상인가 하노라...ㅎㅎ

이 분들은 무서운것도 모르고 하늘까지 찌르고 있다..

 


▽ 독립문 방향에서 올라오면 만날수 있는 인왕산 선바위




▽ 인왕산' 치마바위' 유래

 

'전하께서 나를 생각하며 인왕산을 바라본단 말이더냐?'....

 

1506년 연산군의 폭정에 의거 중종반정이 일어났다.

 중종의 비 신씨는 익창부원군 신수군의 딸로 신수근은 중종반정때 죽었다.

박원종 등 반정공신들은 역적의 딸 신씨를 폐하기를 간청하여 결국 폐하였다.

 

당시 19세 밖에 되지 않은 중종은 궁궐에 들어온지 7일만에 사가로 내쫓긴 옛 왕비가 그리워 경회루에 올라가

인왕산 기슭에 있는 신씨집을 물끄러니 바라보는 날이 많았다고 한다. 

 

신씨는 그 소식을 듣고 궁궐안에서 즐겨입던 붉은치마를 인왕산 높은 바위에 걸어놓았고 이것이 치마바위의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신씨는 평생을 홀로 살다가 1557년 7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고 영조때 복위되어 '단경왕후'라는 시호를 받았다.

 




▽ 윤동주 시인의 언덕에 있는 '서시'다



▽ 윤동주 문학관

 

윤동주 시인 언덕에서 '서시'도 읽어보고 사직공원과 청운동 일대 풍경을 감상하면서

 부암동에 있다는 '운수 좋은날'의 저자 현진건의 옛집터도 둘러보고 싶지만 아직까지 못 가 보았다

 

윤동주 시인이 연희전문학교에 재학 시절 이곳에서 가까운 누상동(현재 옥인동)에서 소설가 김송의 집에서 후배 정병욱 시인)과 함께 하숙생으로 살았으며

그 당시 그의 대표작인 '별 헤는 밤', '자화상' 등의 작품을 남겼지요


물탱크를 재활용한 영상실과 수도가압장 건물을 수리하여 약간 감옥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별헤는 밤의 하늘을 볼수 있는 공간을 제외하고

 문학관 내부는 유족들의 요청으로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어 아쉽게도 마음속으로만 담아와야 했다

 



[최규식 경무관, 정종수 경사 순직 동상]

 

정류장에 하차하면 별헤는 밤의 윤동주문학관 표지판도 보이고 창의문으로 올라가는 계단 옆에는 1968년 1월21일 청와대를 기습 공격하기 위해 자하문근처까지

 침투한 31명의 무장공비를 검문하고 막아서다가 총격을 받고 순직한 당시 종로경찰서 최규식 서장(경무관으로 추서)과 정종수 경사 순직 동상이 서 있습니다.


당시 한겨울 청와대 근처 북악산과 인왕산 일원에서 조명탄을 터뜨리며 치열한 전투를 벌여 거의 대부분 사살되고 김신조를 생포하게 되지요

지금도 선명한 총탄 자국이 남아 있는 호경암과 1.21사태 소나무가 당시 급박한 상황을 잘 보여 주고 있으며 안보교육장으로서 역할도 톡톡히 하고 있지요





[ 북현무 북악산 코스 : 창의문~북악산~1.21사태 소나무~청운대~말바위안내소~숙정문~북정마을~혜화문]

 

▽ 창의문((彰義門)(자하문)

 

'올바른 것을 드러나게 하다'는 뜻이 있는 창의문은 백악산 주변의 경치가 아름다워 자하문(紫霞門)이라고도 하며 지금도 이곳을 '자하문고개'라고도 부르고 있지요

 

창의문은 태조 5년(1396) 도성을 축조할 때 함께 건축되었고 성곽은 약 17km에 달했는데 도성의 동서남북에 4대문(大門)을 두었고, 그 사이에 사소문(四小門)을 만들었고 홍화문(혜화문), 광희문, 소덕문(서소문), 창의문을 일컬어 사소문이라고 하는데, 창의문은 서북쪽의 소문에 해당되며 북한산과 양주 방면으로 통하는 교통로였다


이 곳은 풍수지리상 지네를 닮은 형국으로 반달형 무지개 월단에는 봉황이 그려져 있고 닭발을 그려 넣었다는 이야기와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반정의 공신들의 현판 이야기와 창의문 유래 즉 1956년에 이 문을 보수할 때 장여 속에서 묵서(墨書)가 나왔는데

 여기에는 '1741년(建隆 6) 6월 16일에 상량(上樑)을 하였다' 고 적혀 있어서 건립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었다고 한다.



 [풍수지리설에 따른 폐문과 닭과 지네]

 

창의문은 태조 5년(1396) 서울 성곽을 쌓을 때 세운 사소문(四小門)의 하나로 창건되어 창의문이란 이름을 얻었다

현재의 문루는 1741년(영조 17) 세운 것으로 사소문 가운데 유일하게 원형 그대로 남아 있는 중요한 유적이지요

1413년(태종 13년)에 풍수학자 최양선이 창의문과 숙정문이 경복궁의 양 팔과 같아 길을 내면 지맥이 손상된다고 주장하였고

 이곳의 통행이 왕조에 악영향을 준다는 당시 풍수지리학자들의 주장에 따라 폐문하여 사람들의 통행을 금했다고 합니다

 

문루는 임진왜란(1592) 때 불탔는데 현재의 문루(門樓)는 1741년(영조 17년)에 세운 것으로 4소문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 있는 중요한 유적으로 알려져 있고

최근에는 보물로 지정한다는 이야기를 들은것 같다




[창의문에 얽힌 인조반정 이야기]

 

이곳에는 인조반정때 공신들의 이름이 적힌 현판이 지금도 걸려 있다.

'인조반정'은 광해군 15년(1623) 이귀 등 서인 일파가 광해군 및 집권당인 이이첨 등의 대북파를 몰아내고 '능양군(綾陽君 인조)'을 왕으로 옹립한 정변이다. 1623년 3월 12일 이귀, 김유, 김자점, 이괄 등은 반정계획을 진행하던 중 계획이 일부 누설되었으나 예정대로 실행에 옮겨 장단의 이서군과 이천의 이중로군은 홍제원에서 김유군과 합류하였다. 능양군(인조)를 비롯한 반정군은 창의문을 향해 진군하여 문을 깨뜨리고 입성한 뒤 훈련대장 이흥립의 내응으로 창덕궁을 무난히 점령하였다.

 

이에 당황한 광해군은 궁궐 뒷문으로 달아나 의관 안국신의 집에 숨었다가 체포되어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어 강화로 귀양 보내지고 능양군이 왕위에 오르니 이가 곧 인조이다. 후에 영조는 이 거사를 기념하기 위하여 창의문의 성문과 문루를 개축하고 김류(金臘), 이귀(李貴), 이괄(李适), 원두표(元斗杓) 등 1등 공신에서 3등 공신까지의 공신명을 현판에 새겨 걸어놓게 하였는데 지금까지 그 현판이 문루에 걸려 있는것이다

 


▽ 자북정도(紫北正道)

 

신분증을 확인하고 출입증을 받아 창의문 안내소를 지나 북악산 한양성곽을 조금 타고 가다보면 자북정도(紫北正道)라는 표지석이 나오는데

 '자하문 북쪽의 정의로운 길' 이라고 해석되며 박정희 前대통령의 친필이라고 한다.

 


▽ 북한산 비봉능선이 한눈에 펼쳐진다



[백악산(白岳山, 북악산 342m)]

 

풍수지리에 따르면 백색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금강산 줄기가 북한강 물줄기를 몰고 내려오다가 그 강 끝에 이르러 혼신의 힘을 기울여 만들어 놓은 것이 삼각산이다.

 다시 삼각산의 서쪽 봉우리에 해당하는 만경대의 남쪽 줄기가 뻗어 내려와 마지막 용솟음쳐서 이루어 놓은 것이 '백악산'이다

천하제일 명당 한양의 형세가 여기에서 시작된다고 하네요.

 동쪽의 낙산은 좌청룡이 되고, 서쪽의 인왕산은 우백호, 남산이 남주작을 이루고, 이들을 거느린 백악산은 북현무에 해당하여

 한양 서울은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명당의 요건을 완벽하게 갖췄다고 합니다.

 

세종로 네거리 부근에서 북악산을 바라보면 산이 마치 하얀 연꽃 봉오리처럼 보여서 ‘백악산’이라 부르고

 조선왕조의 정전인 경복궁을 터 잡아 짓고 난 후로 한양의 북방 진산이 된다 하여 ‘북악산’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1.21사태 소나무]

 

앞서 언급했던 1968.1.21.김신조를 비롯한 31명의 무장공비가 청와대를 기습하기 위하여 침투했다가  자하문 근처에서 검문을 받다가 교전을 벌이다

 인왕산과 북악산으로 도주하면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지요. 당시 15발의 총알을 맞은 소나무를 1.21 사태 소나무라고 부르고 있다

 



▽ 그럼 과연 성은 누가 쌓았을까요?


 태조때 5도 장정들이 동시에 쌓았는데 숙정문과 혜화문 사이는 강원도 장정, 혜화문에서 남산까지는 경상도 장정이 쌓았다 하고

 성을 고쳐 쌓은 세종 때에는 낙산주변 성은 충청도 비인 장정들이 쌓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청운대(靑雲臺)]

 

북악산 한양도성내에서 가장 조망권이 좋은 곳으로 남으로 경복궁과 세종로 북으로 북한산의 여러 봉우리를 볼수 있다.

경복궁과 일자로 열려져 있는 옛 육조거리도 한눈에 들어오고 광화문 광장을  한눈에 내려다 볼수 있으나 사진촬영은 안된다

 


[삼청각과 성북동 비둘기 ]

 

삼청각은 1972년 건립되어 1970년~1980년대 한국 기생요정문화의 산실로 알려져 있지요

 

성북동을 바라볼때마다 삼청각과 심우장 그리고 삶의 터전을 잃고 문명에 쫓기는 성북동 비둘기라는 시가 생각난다

 

성북동 비둘기   -김 광 섭 시인-

 

성북동 산에 번지(番地)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그래도 성북동 비둘기는

하느님의 광장(廣場) 같은 새파란 아침 하늘에

성북동 주민에게 축복(祝福)의 메시지나 전하듯

성북동 하늘을 한 바퀴 휘돈다

 

성북동 메마른 골짜기에는

조용히 앉아 콩알 하나 찍어 먹을

널찍한 마당은커녕 가는 데마다

채석장(採石場) 포성(砲聲)이 메아리쳐서

피난하듯 지붕에 올라 앉아

아침 구공탄(九孔炭) 굴뚝 연기에서 향수를 느끼다가

산 1번지 채석장에 도루 가서

금방 따낸 돌 온기(溫氣)에 입을 닦는다

 

예전에는 사람을 성자(聖者)처럼 보고

사람 가까이

사람과 같이 사랑하고

사람과 같이 평화(平和)를 즐기던

사랑과 평화의 새 비둘기는

이제 산도 잃고 사람도 잃고

사랑과 평화의 사상까지

낳지 못하는 쫓기는 새가 되었다

 



[북대문으로 불렀던 숙정문(肅靖門)]

 

  사대문(四大門) 중 하나로 도성의 북쪽에 있다고 하여 북대문(北大門) 또는 북문이라고도 부른다.

 경복궁의 주산(主山)인 백악산의 동쪽 고개에 자리 잡고 있는 이 문은 태조 4년인 1395년에 건립되었고

태종 13년에 풍수가인 최양선(崔揚善)이 임금에게 백악산 동쪽 고개와 서쪽 고개는 경복궁의 양팔에 해당하므로 여기에 문을 내면 안 된다고 청하였다.

 그의 말을 받아들여 마침내 창의문(彰義門, 일명 자하문)과 함께 문을 폐쇄하고 길에 소나무를 심은 뒤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하였다.

원래 이 문은 높은 산 중턱에 있으므로 길이 험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통행이 빈번하지 않았던 곳이라 이 문을 폐쇄해도 아무런 지장이 없어서 영구히 닫아두었다.

 다만 나라에 가뭄이 심할 때에 이 문을 열고 숭례문을 닫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원래의 이름이 숙청문인 이 문이 어느 때부터 숙정문으로 바뀌었는지 확실하지는 않다.

1976년 문을 복원하고 숙정문이라는 편액을 걸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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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취병이라는 자연친화적인 울타리



▽ 성북구 북정동과 와룡공원을 향하여 도성길을 걸어간다



[혜화문]

 

 도성에는 4개의 대문과 4개의 소문(小門)이 설치되었는데 이 문은 동문과 북문 사이에 세워졌다고 하여 '동소문(東小門)'이라고도 한다

처음에는 문 이름을 '홍화문(弘化門)'이라 하였다가 1483년(성종 4) 새로 창건한 창경궁의 동문을 홍화(弘化)라고 정함에 따라

 혼동을 피하기 위하여 1511년(중종 6) 혜화로 고쳤지요

 

무지개 모양의 천장에는 봉황을 그려 이 일대를 새들의 피해로부터 보호하고자 했다는 말이 전해오기도 합니다





[ 좌청룡 낙산 코스 : 한성대입구역~낙산공원~이화동벽화마을~도성박물관~흥인지문 ]



태조는 조선 건국초기인 1394년 한양으로 천도한뒤 가장 먼저 종묘, 사직, 궁궐을 건설하고

 1395년 도성건설을 위한 도성축조도감(都城築造都監)을 설치하고 우선 정도전을 시켜 한양의 산세를 살펴보고

 백악산/북악산(북현무, 北玄武)을 중심으로 동으로 낙산(좌청룡,左靑龍), 서로 인왕산(우백호, 右白虎), 남으로 목멱산/남산(남주작, 南朱雀)이

서울을 에워싼 내사산(內四山)을 잇는 약19km에 이르는 성터를 확정짓고 이듬해 도성축조에 착수를 한다 

 

그래서 이때 무학대사와 정도전이 대립하게 되고...

 

사실 낙산은 도성의 동쪽에 위치한 좌청룡(左靑龍)의 기상을 가지면서도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은 산으로

 낙산공원의 몽마르뜨 언덕은 아쉽게도 아베크족들이 서울시내 야경을 구경하고 이화동 벽화마을을 탐방하는 정도였다

  

낙산은 낙타의 등처럼 생겼다고 해서 '낙타산'이라 하다가 '낙산'이 되었고 낙산은 지금은 정상 근처까지 아파트와 집들이 들어서

 산인지 언덕인지 구분도 안 되지만, 조선시대에는 풍수지리상 도성의 ‘좌청룡(左靑龍)’에 해당하는 매우 중요한 산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문제는 낙산이 인왕산에 비해 너무 낮고 산줄기도 짧은데 있었고

인왕산의 높이 338m에 비해 낙산은 125m에 불과하고 너무 낮아 균형이 맞지 않았던 것이다

  

 낙산 아래 동대문도 지대가 낮아 돌을 깔고 문루를 올리느라 다른 세 대문보다 두 배의 공력이 들었고 공사 또한 늦어지고

 비보풍수로 동대문에 '지(之)'자를 넣어 기운을 보강하기도 했다고 한다

 


▽ 최근에 혜화문에서 낙산산성으로 바로 건널수 있는 횡단보도가 새로 생겼다



▽ 장수마을은 성곽아래 골목길과 집들이 특이하게 배치된 마을로 알려져 있으며

 화장실 하나만 있으면 참 좋겠다는 할머니들의 말씀이 있었다

 


▽ 아이들의 역사문화 탐방도 눈에 들어온다




  

 

▽ 암문은 비상용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성안과 밖을 연결하는 통로로서 역할을 하였다고 하지요

 옛날로 돌아가 여교시절 교복을 입은 탐방객들과 기념촬영도 하고 이화동벽화마을을 잠깐 들렀다가 나온다

(본인들의 동의를 미리 받았음을 밝혀둡니다)





▽ 최근에 물고기와 꽃계단을 지워버렸다는 이화동(梨花洞) 벽화마을이다

 

이화동은 낙산공원아래 조그만 마을로 당시 소외된 지역의 시각적 환경을 개선하고자 60여명의 예술가들이

 동네 곳곳에 그림을 그리고 조형물을 만들어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찾는 명소가 되었으나 최근 탐방객들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주민 불편이 가중되고 있다고 하니 조용히 탐방했으면 좋겠다

  





▽ 도성박물관을 바라보며 이화여자대학교 동대문병원이 있던 자리로 향한다







▽ 흥인지(之)문


좌청룡인 낙산이 그 지세가 약하여 풍수지리적인 비보책을 많이 썼는데 그 중에 하나가 낙산의 지세를 연장하기 위해

한양의 사대문 글씨가 모두 세 글자인데 흥인지문(興仁之門)은 산맥을 연상케 하는 '갈 지(之)자'를 고종때 한자 더 추가하였을 뿐만 아니라

지대가 낮고 외세의 침입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하여 다른 사대문에서는 볼 수 없는 '옹성'을 구축하였다고 한다

 


흥인문과 숭례문, 광희문에는 '용'이 그려져 있고 창의문 혜화문은 '봉황'이 그려져 있다고 한다

 


왜 동대문은 흥인문(興仁門)으로 하지 않고 '흥인지문(興仁之門)'으로 했을까요?

 

서울의 사대문(四大門) 이름은 숙정문, 숭례문, 돈의문, 흥인지문인데 무엇 때문에 동대문만 흥인문(興仁門)으로 하지 않고

 '흥인지문(興仁之門)'한 이유는 좌청룡인 낙산의 지세가 약하니 지(之) 자(字)를 넣어 늘려 주는 비보(裨補)를 한 것이라고 한다 




 

[ 남주작 남산 코스 : 동대문~동대문운동장~광희문~장충체육관옆~국립극장~남산~숭례문~정동길~경교장]

 


▽ 청계천 오간수문



▽ 보존설치된 동대문 운동장 조명탑





▽ 이간수문



▽ 당시 도성안의 시체가 나가던  광희문




▽ 장충체육관




▽ 성곽마루



▽ 남산공원과 국립극장











▽ 서울의 중심점




▽ 남산 팔각정을 배경으로 인증샷...





▽ 남산 봉화대




▽ 한양도성을 순성하면서 남산에 도착하면 아름다운 일몰을 감상할수 있어 좋다





▽ 백범 김구 선생 동상




▽ 힐튼호텔 너머로 소나무와 일몰을 담아본다






▽ 서울역 고가도로는 한창 공사중이다



▽ 장장 10시간 가까이 놀멍쉬멍 드디어 숭례문으로 원점회귀하였다




▽ 숭례문의 야경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