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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경상권

청량산 클린산행 및 명산100 어게인 (No.034)

by 풍경감각 2017. 10. 21.

청량산 클린산행 및 명산100 어게인 (No.034)

♡ 일시 : 2017.10.21(토)

♡코스 : 입석~응진전~총명수~청량사~뒷실고개~하늘다리~장인봉~금강대~청량산안내소

누구랑 : 블랙야크 명산100 클린도전단 45명과 함께...



봉화에 있는 청량산은 대한민국 명승 23호로 지정된 유서깊은 명산으로 봉화8경의 1경으로 안동 예안과 연결된다


예로부터 봉화는 백두대간에 걸쳐있는 두메산골이자 첩첩산중으로 금강송과 춘양목으로 유명하고 그 아래서 자라는 송이도 일품이다.


 최근에는 생태체험과 호랑이숲이 조성된 국립백두대간수목원이 개장되어 큰 인기를 끌고 있다. 

특히 안동권씨 집성촌인 '닭실마을'은 조성 중종때 기묘사화로 파직된 권벌 선생이 지은 충재가 있고

 그 연못 한가운데 청암정이 있는데 조선시대 대청마루의 웅장함을 엿볼수 있다.


또한 조선시대때부터 심어놓은 노란 산수유로 잘 알려진 '띠띠미산수유마을'이 있는데

원래 뒤가 막혀 있다는 두곡마을이 뒷뜸이마을로 불리다가 띠띠미마을로 소리변형되었다고 한다. 


봉화에서 평생 땅을 지키며 30년간 소와 동고동락했던 최노인의 이야기를 가슴 저리게 풀어냈던 영화 '워낭소리'의 촬영지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쓴 유홍준 교수는 ‘외지인의 상처를 받지 않고 옛 이끼까지 곱게 간직한 살아있는 민속촌‘ 이라고 극찬을 했는데

 그만큼 선비의 고장으로 아직까지 때묻지 않고 순결한 곳이라는 의미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봉화기행을 꼭 한번 해보고 싶다. 

 

청량산은 산세가 수려하여 예로부터 '소금강'이라 불렀고 1982년 경상북도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원레 청량산은 수산(水山)으로 불려지다가 조선시대에 와서 금탑봉에 아래 자리잡은 상청량암과 하청량암이 널리 알려지면서

언제부터인가 산이름이 '청량산'으로 바뀌게 되었다고 하는데 그 구체적인 시기는 확실하지 않다.



봉화 청량산 육육봉에 올라서면 '산은 연꽃이요, 절터는 꽃술'이라는 사실을 저절로 깨닫게 될것이다


신라시대 자장율사가 중국 청량산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오대산에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시고나서 이곳 청량산에 들렀을때

 아, 이산이 청량산이거늘 그토록 인연을 맺기가 어려웠단 말인가? 라고 말할정도로 천하명당인 청량산에 들게 되면

 옛 성현과 석학, 고승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으며, 골짜기와 봉우리마다 숱한 전설과 설화를 들을수 있다


 신라시대 해동서성으로 불린 명필 김생이 10년간 글공부를 했다는 김생굴과 청량봉녀설화, 고운 최치원이 마셨다는 총명수,

약차를 무료로 마실수 있는 산꾼의 집과 퇴계선생이 공부했던 청량정사, 유리보전 지불과 삼각우송, 응진전의 동풍석과 불족암,

제2차 홍건적의 난을 피해 몽진한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이야기가 남아있는 오마대와 밀성대. 공민왕당과 놋다리걷기 전통,

 하늘다리와 장인봉 정상석에 새겨진 주세붕선생의 등청량정시, 금강대와 아름다운 소나무들...

 퇴계선생이 13살때부터 안동 예안에서 사십여리를 걸어 숙부에게 논어를 배우러 다닌 청량산...

 말 그대로 그림으로 들어가는 길이라는 아름다움과 유구한 역사와 문화가 흐르고 있는 명산중의 명산이었습니다




블랙야크 클린도전단 45명은 입석에서 출발하여 원효대사 구도의 길을 따라 산사음악회가 열리고 있는 청량사에 들러 유리보전과 삼각우송을

 둘러보고,가파른 뒷실고개를 올라 하늘다리를 건너 정상인 장인봉(870m)에 올라 명산100 어게인 인증도 하며 등산로 주변을 청소하였습니다

하산길에 수많은 계단이 힘들게 했지만, 곱게 물든 단풍과 금강굴 근처의 명품소나무인 할배할매송, 여여송, 삼부자송의 환송을 받고,

석양에 물들기 시작한 학소대와 축육봉을 바라보며 낙동강 줄기에 있는 청량산안내소까지 안전하게 하산하였습니다



청량산을 이야기할때 스스로 '청량산인'이라는 호까지 지은 퇴계 선생을 빼 놓을수가 없을것이다.

심지어 '청량산을 가보지 않고는 선비노릇을 할 수 없다'라고 단언한 퇴계선생은

 죽어서도 청량산을 잊지 못해 청량산 바로앞 건지산 자락에 묻힌다


13세 때 숙부에게 학문을 배우기 위해 안동 집에서 청량산으로 이어지는 강변길을 따라

청량산과 낙동강이 빚은 자연의 조화를 즐기며 그 길을 '그림으로 들어가는길'이라고 표현했다고 한다

나중에 이 산에 머물며 후학을 가르치기도 했던 청량산에는 지금은 퇴계 오솔길과

 녜던길이 단장되어 많은 사람들이 그가 걸었던 길을 따라 걸을수 있게 되었다  




퇴계선생은 '유산(遊山)은 독서와 같다'라며 산을 찾는 것 자체를 마음수행,지식수행으로 여기고 청량산에 관련된 시만 51편을 남긴다

그 중의 대표적인 시가 '청량산가(靑亮山歌)'인데 시비가 청량사 입구에 세워져 있다


“청량산 육육봉(六六峯)을 아는 이 나와 백구(白鷗).

백구야 훤사(喧辭)하랴. 못 믿들손 도화(桃花)로다.

 도화야 뜨지 마라 어주자(魚舟子)알까 하노라”


이글은 퇴계선생의 청량산에 대한 애톳한 사랑을 담은시로 얼마나 좋았으면 그 산을 남들이 알까 두려워했을까요

그는 도산서원에서 후학을 가르치면서도 늘 청량산을 그리워했다고 한다



선학정을 지나 입석이 있는 공터에서 준비운동을 하고 클린산행을 시작한다



입석(立石)은 말 그대로 서 있는 돌이라는 뜻으로 예로부터 선돌, 선바위 등으로 불려졌으며 아들을 낳아 달라는 기자(祈子)신앙의 대상이 되었고, 흔히 입석은 잉태와 생산, 노동과 풍요를 상징하고 있으며, 천하제일 남근석과 부용암등으로 불리는 여근석은 교묘하게 근처에 함께 있어 음양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청량사로 바로 올라갈려고 했으나 워낙 사람들이 많아 원효대사 구도의 길을 따라 응진전으로 올라간다






청량산엔 한때 30암자가 있어 봉우리마다 불경소리가 끊이질 않았다고 하지만 지금은 금탑봉 중간 절벽 아래에 응진전(應眞殿)만 남아 있다.

건너편 축융봉 조망이 으뜸인 이 곳에는  석가삼존불과 16나한, 그리고 공민왕의 부인인 노국공주의 상이 모셔져 있다

제2차 홍건적의 난때 공민왕은 경주까지 피신할려고 했으나, 안동사람들의 극진한 환대를 받고 이곳에 머무른것으로 알려져 있다

안동 소야천을 건널때 공민왕은 말을 타고 쉽게 건너갔으나, 노국공주는 물에 빠지지 않도록 이곳 여인들이 일렬로 허리를 굽혀

등을 밟고 지나가게 했는데 지금 안동지방에 전해 내려오는 '놋다리밟기'라는 전통놀이의 시초가 된다.




응진전 뒤쪽의 큰 암봉 위에는 ,동풍석(動風石),이라는 작은 바위가 얹혀 있는데, 바람만 불어도 움직인다고 하여 ,건들바위라고도 한다.

옛날 한 스님이 이곳에 절을 지으려다가 암봉 위에 바위가 있는 걸 보고 올라가 떨어뜨렸는데, 이튿날 보니 그 바위가 제자리에 있었고,

여러번 반복되자 스님은 이것이 불심이라고 생각하고 결국 절을 짓지 않았다는 전설의 바위다.



응진전 옛 암자뒤로 돌아가면 절벽 사이로 스며서 흘러내린 '감로수'가 있는데 물맛이 좋아 승려들이 명명한 이름이고

원효 대사가 상청량암에서 수도할 때 마신 물이라 하여 원효정(元曉井)이라고도 하는데 문이 잠겨있다.

이곳에서 바위틈으로 올려다보면 부처님 발을 닮은 '불족암'과 신비한 여체모양의 바위를 볼수 있다는데

아무리 고개를 들어 올려다봐도 찾을수가 없었다.



응진전 내부에는 석가삼존불과 16나한이 봉안되어 있고 공민왕 부인 노국대장공주상이 안치되어 있다

법당앞에 사방을 조망할수 있는 전망대가 있는데 신재 주세붕(1459-1554)자신의 자(字)를 따서 '정유대'라 이름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숭유억불정책으로 청량산의 사암들도 거의 없어지고 보살봉이 자소봉으로 바뀌듯이 불교식 이름이 많이 바뀌게 된다




신라 말 대문장가로 알려진 고운 최치원(857?)에 관한 유적이 청량산에 많이 남아있는데

 그와 관련된 유적으로는 치원암, 총명수, 풍혈대 등을 들 수 있다.



어풍대를 뒤로 돌아가면 고운 최치원이 마시고 머리가 맑아졌다는 '총명수(聰明水)'를 만난다.

과거를 준비하는 선비는 물론 많은 이들이 찾아와 마셨다는 전설의 석간수로, 요즘도 지나는 등산객들은 누구나 한모금씩 마시고 간다지만

실제로 물을 한바가지 떠서 마셔볼려고 했으나 개방된 우물로 수질검사가 안된것 같아서 입술만 대고 말았다.



조금만 올라가면 나타나는 김생굴은 신라 명필 김생이 글씨를 공부했다는 석굴이지만 코스를 변경하여 청량사로 바로 내려간다

이곳에서 10년을 기약하고 글 공부하던 김생이 9년 만에 하산하려 하자 그의 부족함을 일깨워줘 10년을 꽉채워 공부하게 만들었다는

길쌈처녀 청량봉녀의 전설이 전해져 오는데, 후대의 한석봉과 떡을 썰던 그의 어머니 이야기와 판박이로 너무 닮았다^^...ㅎㅎ

이곳에서 공부해 해동서성이라는 명필로 이름을 날린 김생의 필법은 청량산의 암봉을 닯았고 탁필봉, 연적봉등의 이름이 남아 있다

(사진은 창고사진. 2014년3월 촬영)







응진전에서 청량사로 넘어가는 길목에 있는 풍혈대를 내려서면 청량산 최고의 전망대 어풍대가 나온다

여기에 서면 '산은 연꽃이요, 절터는 꽃술' 이라는 청량산 육육봉의 절경을 한눈에 볼수 있다


사진작가들이 '어느 각도에서 찍어도 작품이 된다'고 말하는 바로 그 절 청량사다

 매년 이맘때쯤이면 열리는 산사음악회가 오늘 열린다고 하며 한영애, 장수라, 마야 등이 출연한다고 한다

바람불면 쩅그랑 거리는 정정동동 풍경소리를 기대하고 왔는데 멀리서 바라보니 5층석탑 명당자리도 앰프설치로 사진찍기는 틀린모양이다

벌써부터 리허설 준비로 아마츄어 가수들을 불러모았는지 노란셔츠 입은 사나이를 불려제끼더니 뒤실고개 넘어갈때까지

계속 쿵쾅거리는 음악소리가 들려와 영 귀에 거슬린다



다소 가파른 계단길을 내려오면 퇴계선생이 공부하면서 머물렀다는 '청량정사'가 나타나는데

 약차를 무료로 마실수 있는 '산꾼의 집'과 나란히 붙어 있다







청량산은 옛 퇴계 가문의 산으로 그의 5대 고조부 이자수가 송안군(松安君)으로 책봉되면서 나라로부터 받은 봉산이다.

퇴계는 13세(1513년 2월)때 삼촌인 송재 이우 선생에게 논어를 배우러 다니면서 청량산과 깊은 인연을 맺게 되고,

자신의 호조차 ‘청량산인’으로 짓고, 평생을 이산에 올라 학문을 탐구했으며 꿈에서도 이 산을 잊지 못했다고 한다



연꽃 같은 청량산 암봉들 한가운데에 자리 잡은 '청량사'는 흔히 '구름으로 산문을 지은 청정도량' 이라고도 한다

그만큼 '산은 연꽃이요, 절은 수술이다' 라는 말이 정말 잘 어울리는 절이다


본전인 유리보전(琉璃寶殿)은 모든 중생의 병을 다스리는 약사여래불을 모신 전각으로 닥종이를 다져 만든 '지불(紙佛)'이라는 점이 특이하다

6·25전쟁 때 불에 타버린 문수전의 문수보살과 명부전의 지장보살을 약사여래불 죄우에 모시고 있다 



청량사는 신라 문무왕 3년(663)에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천년고찰로 창건당시 승당등 33개의 부속 건물을 갖추었던 대사찰로

청량산  봉우리 마다 자리잡은 암자에서는 스님들의 독경소리가 청량산을 가득 메웠다고 한다.


지금 이절의 주지인 '지스님'은 글 솜씨도 뛰어나서 '바람이 소리를 만나면' 이라는

 수필집도 냈으며 그의 글이 청량산 입구에 걸려 있기도 하다



청량산에 한때는 신라의 고찰인 연대사(蓮臺寺)와 망선암(望仙菴)등 대소 27개소의 암자가 있어서

 당시 신라 불교의 요람을 형성하였고 불국정토를 꿈꾸던 시절도 있었다고 한다






청량사의 본전인 유리보전과 오층석탑 사이에 우뚝 서 있는 소나무가 이름하여 '삼각우송(三角牛松)'이다.

사하촌에서 시주받은 뿔이 셋 달린 소가 원효대사와 함께 이 절을 오르내리며 일을 하다가 죽자 그 소를 묻은 자리인 삼각우총(三角牛塚)에

소나무가 자라면서 신기하게도 세개의 가지가 뻗어나와 '삼각우송(三角牛松)'이라고 부르는데 대부분 그냥 지나치기 일쑤다




응진전과 함께 지어진 천년고찰 청량사에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7호 유리보전에는 약사여래 지불이 모셔져 있다




청량사 본전인 ‘유리보전(琉璃寶殿)’의 현판은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 때 피난와서 쓴 친필이라 전해진다.

유리보전안에는 약사여래불과 지장보살, 문수보살이 모셔져 있는데, 무병장수를 나타내는 약사여래불은 건칠불(乾漆佛)로

 종이를 녹여 만든 국내 유일의 ‘지불(紙佛)'로 지금은  금칠을 했으며, 그 옆의 문수보살은 16겹의 모시로 만들어진 불상이라고 한다.





먼데서 바람불어와 풍경소리 울리면 보고싶은 내마음이 찾아간줄 알아라^^...ㅎㅎ

산사에 울려퍼지는 청아한 풍경소리가 너무 좋아 나의 닉도 오죽했으면 풍경소리일까요?



청량사 하늘다리는 해발 800m지점의 선학봉과 자란봉을 연결하는 연장 90m 폭 1.2m 높이 70m의 산악현수교량으로  2008년 5월 봉화군에서

 유교문화권관광개발사업의 일환으로 설치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감악산, 구봉산 구름다리에 밀려 1위 자리를 내어주고 말았다







청량산 봉우리들은 흔히 육육봉(六六峯)이라 불린다. 이는 빼어난 아름다움을 내세우는 12봉우리를 말하는데,

가장 높은 장인봉을 비롯해 외장인봉, 축융봉, 경일봉, 선학봉, 금탑봉, 자소봉, 자란봉, 연화봉, 연적봉, 향로봉,탁필봉이 그것이다.

조망 좋은 어풍대, 밀성대, 풍혈대, 학소대, 금강대, 원효대, 반야대, 만월대, 자비대, 청풍대, 송풍대, 의상대는 따로 12대(臺)라 일컫는다.

특히 밀성대는 공민왕때 범죄자와 싸움에서 도망친 죄수들을 처형하던 장소로 앞 봉우리와 연결된 사다리를 건너가게 한후에

 사다리를 치워버려 떨어져 죽게 했다고 하는데 그 아래에 백골이 가득했다고 한다



금번에 새로 지급된 셰르파복으로 작년에 보온, 활동성 등 탁월한 성능이 입증된 명풍자켓이다








하늘다리에서 바라볼수 있는 축융봉 능선에는 1361년 홍건적의 침입을 피해온 공민왕이 1년간 머물면서 쌓았다는 16km의 청량산성이 있고.

죄수를 절벽 끝에서 밀어 처형했다는 밀성대, 공민왕의 거처에 세워진 공민왕당 등 많은 유적지가 있는데 학소암을 거쳐 그곳으로 산행을 한번 해야 하겠다



청량산의 단 한가지 흠이라면 계단이 너무 많다는것^^...ㅠㅠ




청량산의 정상은 '장인봉(丈人峯, 870.4m)'으로 신라 명필 김생의 글씨로 표시되어 있다 

원래 청량산의 주봉인 장인봉은 의상대사가 입산수도한 곳이라고 하여 '의상봉'으로 불려졌고

옛날에는 '대봉(大峰)'으로도 알려졌으나 주세붕'장인봉(丈人峯)'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장인(丈人)'의 '장(丈)'은 대자(大字)의 뜻을 부연한 것으로써 멀리 중국 태산(泰山)의 장악(丈嶽; 큰산)을 빗대어 본 것이라고 한다





登淸凉頂(등청량정) -청량산 정상에 올라 -


                                              愼齋(신재) 周世鵬(주세붕)


我登淸凉頂(아등청량정) 청량산(淸凉山) 꼭대기에 올라

兩手擎靑天(양수경청천) 두 손으로 푸른 하늘을 떠받치니.

白日正臨頭(백일정임두) 햇빛은 머리 위에 비추고

銀漢流耳邊(은한유이변) 별빛은 귓전에 흐르네.

俯視大瀛海(부시대영해) 아래로 구름바다를 굽어보니

有懷何綿綿(유회하면면) 감회가 끝이 없구나.

更思駕黃鶴(갱사가황학) 다시 황학을 타고

遊向三山嶺(유향삼산령) 신선세계로 가고 싶네.




장인봉을 넘어 수많은 계단과 단풍을 구경하면서 금강대로 하산한다










봄이면 노란 꽃을 피우는 생강나무도 단풍으로 물들어간다







금강대 전망대를 들렀다가 내려오면 애틋한 사연이 있는 아름다운 명품 소나무를 만나게 된다

석양이 가까워지는 매직아워에 할배할매송과 여여송, 삼형제송을 볼수 있다








오른쪽으로 낭떠러지가 있는 금강굴이다









청량산의 입구 동문의 개울 옆에는 크고 넓은 바위가 있는데 앉아서 쉴 만한 곳으로 '장암(場巖, 마당바위)'이라 하는데

 퇴계선생이 일찌기 청량산에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쉬면서 시를 읊었던 곳이라고 한다

지금은 등산객들이 쉴 수 있고 발을 씻을수 있게 만들어 놓았고, 낙동강을 따라 녜던길이 조성되어 있다



장암 옆에 깎아지른 암벽이 있는데 학(鶴)의 둥지가 있어 위는 희고 아래는 검은 새가 때때로 오고간다 하여

 '학소암(鶴巢巖)'이라 불렀다고 하며 축육봉으로 올라가는 길이 연결되어 있다



공민왕이 청량산에 들어갈 때 낙동강을 건너야 했는데, 그때 교량이 없어서 인근 동리의 부녀자들이 나와 횡대로 늘어서서

 허리를 엎드리게 한 후 왕비와 공주들이 부녀자들의 등을 디디고 강을 건너게 하였고, 왕은 다섯필의 말을 탄 기병들과 함께 강을 건넜다 한다.

 이때 공민왕이 건넌 곳을 나분들, 공민왕당으로 가는 절벽의 암대를 오마대(五馬臺), 공민왕이 거처하던 곳을 공민왕당(恭愍王堂)이라 했다.


또한 공민왕이 개경으로 환궁한 후, 매년 정월 보름날에 처녀들이 옷을 곱게 차려입고 한 줄 횡대로 늘어서서

일제히 허리를 90도로 굽혀 나란히 엎드리고 칠보(七寶)단장한 귀부인(왕비와 공주를 뜻함)이 등 위에 올라서서

좌우로 시녀들의 부축을 받으며 차례로 등을 밟아 천천히 걸어 끝까지 강을 건너게 하는 행사를 가졌다 한다.


이 놋다리밟기는 구한말까지 정월에 진행되어 하나의 민속놀이로 이어져 왔었다고 한다 



청량산 안내소로 하산하여 쓰레기를 분리수거하고 청량산박물관 주차장으로 이동을 한다

이곳에서 윤진하세르파가 사준 영주사과를 한입 베어물고 서울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