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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킹/역사문화탐방

오대산 선재길 BAC역사문화탐방 이야기

by 풍경감각 2018. 10. 13.

[오대산 선재길 BAC역사문화탐방 이야기]

 

♡ 일시 : 2018.10.13(토)

♡ 코스 : 월정사 일주문~성황단~월정사~선재길~상원사

♡ 누구랑 : BAC역사문화탐방단 40여명과 함께...

 

최근 주말에만 어찌된 영문인지 오대산을 3번이나 찾았습니다.

덕분에 월정사와 선재길, 상원사와 문수보살, 중대사자암과 적멸보궁, 비로봉과 상왕봉,

계방산 운두령과 진고개까지 두루두루 섭렵할수 있어 즐거웠습니다

 

오늘은 BAC역사문화탐방단 40여명과 함께 월정사에서 상원사까지 오대천을 따라 곱게 물든 단풍을 구경하면서

 선재동자와 구도자들이 걸었던 그 길을 행복하게 걸었습니다. 

 

오대산에서 선재동자처럼 부처님 가피와 함께 지혜의 빛을 얻고 싶었던 마음을

 탄허스님이 쓰셨다는 월정사 적광전 주련으로 대신해봅니다

 

萬代輪王三界主(만대윤왕삼계주)

雙林市滅幾千秋(쌍림시멸기천추)

眞身舍利今猶在(진신사리금유재)

普使群生禮不休(보사군생예불휴)

 

만대의 왕이여 삼계의 주인이여

사라쌍수 열반이래 얼마나 세월이 흘렀는가

부처님 진신사리를 지금 여기에 모셨으니

뭇 중생으로 하여금 예불을 쉬지 않게 하리...

 

오늘 진행과 해설에 수고해주신 블랙야크 셰르파님들과 함께 해 주신 도전단 여러분께 감사드리고

 예기치 않은 부상으로 어려움을 겪고있는 회원님들의 빠른 쾌유를 기원합니다

 

셔틀버스 운행이 2019년으로 연기되면서 월정사 입장료 인상은 미루어졌습니다

성인 단체 2,500원(개인 3,000) / 청소년, 학생, 군경 등의 단체 1,000원(개인 1,500원) / 어린이 단체 400원(개인 500원)이며

 1시간에 1대씩 월정사와 상원사 사이를 오가는 시내버스가 예전과 같이 운행합니다(요금 별도).

다행히 숲사랑지도원으로 무료입장을 합니다

 

2018.10.13(토) 풍경소리

 

 

 

월정사 매표소를 지나면 일주문이 나옵니다. 우린 일주문에서 내려 월정사 천년의 숲 속으로 들어섭니다.

일주문 글씨는 현대 불교계의 큰 별이셨던 탄허대사(1913~1983)의 글씨입니다.

탄허는 한국전쟁 때 상원사를 지켜낸 한암선사의 제자입니다.

한암선사는 6.25전쟁때 국군이 상원사를 불태우려하자 나를 태우라며 드러누워 결국 문짝만 태우게 해 절을 지켜냅니다

특히 한암선사는 입적할때 좌탈입망(坐脫入忘)을 하여 백마디의 법문보다 더 무게가 느껴지는 모습을 보여주었지요

 

 

 

오대산은 5개의 봉우리와 5개의 전망 좋은 대(높은 바위 전망대)가 모여, 하나의 연꽃을 이뤘다고 하여 오대산으로 불렸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오대산이란 이름은 견당유학파 불도인 자장율사가 문수신앙의 계를 받은 중국 산서성 청량산의 별칭으로,

자장율사가 문수보살을 찾아 오대산을 헤맬 때 붙여진 이름이란 게 정설입니다.

'오산'은 호령봉, 비로봉, 상왕봉, 두로봉, 동대산이고 오산의 줄기로 대를 이루는

 만월산, 기린산, 장령산, 상왕산, 지로산을 일컬어 '오대'라고 합니다.

각 대 아래 각각 다섯 개의 암자를 두었고,

그 중 조선시대 한강의 발원지로 알려진 서대 염불암(현 수정암) 우통수의 물맛을 최고로 쳤습니다.

 

 

 

일주문에서 월정사 앞 금강교까지 약1km 구간이 월정사 전나무 천년의 숲길로 유명합니다.

이곳은 80년 이상 자란 전나무 약 1800 그루 정도 자라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3대 전나무 숲을 꼽자면, 이곳과 변산 내소사 입구 그리고 남양주 광릉수목원입니다.

 

 

 

그런데 왜 절집마다 전나무가 많을까요? 학자마다 의견은 분분하지만

소나무는 궁궐건축이나 전선(배)을 만드는데 쓰여, 조정에서 봉산정책이나 사산금표로 벌목을 금지시킵니다.

소나무 대용으로 곧게 뻗은 전나무를 이용, 사찰의 전각 등을 짓거나 수리하는 용도로 심었다는 게 정설입니다.

 

 

 

옛 월정사 주변 화전민촌 주민들의 수호신 주재처 성황각입니다.

화전민들은 1968년 울진과 삼척의 무장공비 침투사건 후 현재 식당촌 지역으로 강제 이주됐습니다.

특히 월정사 천년 숲 속엔 각종 야생식물과 야생동물이 많아, 국립공원 내에서도 특별보호구역입니다.

고려 문종 때 성황신앙이 전래된 후 고려 조정에선 성황당을 설립하고 제례를 올립니다.

이 제례가 조선 전기까지 국가 주도로 봄 가을 제사로 이어지다가, 조선 중기 이후 성리학자(사림파)들이 음사로 규정하면서

 국가적 제사 대상에서 제외되어 민간 주도의 신앙으로 변모하게 됩니다

 

 

 

성황신을 모신 곳이 성황각입니다. 원래 성황신은 성을 지키는 신을 의미했지만,

 우리나라에 들어와선 마을이나 공동체를 지켜주는 신이 됐습니다.

고려와 조선에선 국가의 공식적인 제사를 올리는 사당(성황사)으로 격이 높았지만,

지방 호족들이 성황신앙을 받아들이면서 민간신앙으로서의 독자성을 띄게 됩니다.

국가에서 제례를 드리는 성황신의 사당은 '성황당'이나 '부군당'으로 나라나 관청을 지켜주는 군신이고,

 민간신앙의 사당은 서낭신을 모신 서낭당으로 액이나 질병으로부터 마을 주민들을 구원했습니다.

 

 

 

 

월정사 일주문에서 금강교까지 1km 구간은, 80년~400년 된 전나무 1800그루가 하늘로 쭉쭉 뻗은 천년의 숲입니다

 

 

 

오대산엔 전나무만 있고 소나무가 없는 이유를 전설이 설명합니다.

"고려 말 나옹선사가 매일 상원사에서 적멸보궁으로 올라 부처님께 콩비지를 공양했다.

어느 한겨울 콩비지를 갖고 내려가는데 소나무 가지 위에서 떨어진 눈이 콩비지를 덮친다.

나옹선사는 '이 소나무야, 너는 어찌 부처님 진신이 계신 이 산에 살며 큰 은혜도 모르고 어찌 부처님께 올릴 공양을 버리게 했느냐?'고

 소릴 치자, 그 소릴 들은 산신령이 소나무에게 벌을 내려 이곳에 살지 못하게 하고,

전나무 9그루에게 '산의 주인이 되어 번창하라'고 명하면서부터 오대산엔 전나무가 주인 노릇을 하게 됐다"는 전설입니다

 

 

 

 

 

 

 

 

 

 

 

 

 

월정사 천년 전나무 숲은 금강교에서 끝을 맺고, 월정사 구내로 발을 딛게 됩니다. 금강교 아랜 금강연이 놓였습니다.

월정사 법당은 적광전입니다. 적광전엔 원래 비로나자불을 모셔야 하나 옛 월정사 전통대로 석가모니불을 모셨습니다.

 

 

 

오대산 5개의 연꽃잎이 활짝 펼쳐진 곳, 그 중앙 꽃심에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가져온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이 있습니다.

월정사는 선덕여왕 12년(643년) 자장율사가 문수보살의 주재처를 찾던 중 초막을 짓고 머문 곳으로 알려졌습니다.

 월정사는 한국동란 때 전소되었는데, 돌로 된 팔각구층석탑(국보 제48호)과 석조보살좌상(보물 제39호)만이 살아남았습니다.

오대산 선재길은 월정사 일주문부터 시작됩니다.

 

 

 

 

 

 

 

적광전 앞엔 한국전쟁의 참화 속에서도 살아남은 팔각구층석탑(국보 제48-1호)과 석조보살좌상(국보 제48-2호)이 있습니다.

팔각구층석탑은 신라시대 자장율사 조성설 등이 설왕설래하나, 10C 초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이란 설이 정설입니다.

 

 

 

국보 제48-2호 석조보살좌상의 진본은 월정사 성보박물관에 전시돼 있고, 현장엔 복제품이 놓여져 있습니다.

 

 

 

 

 

 

 

오대산 선재길은 월정사에서 상원사까지 단풍을 따라가는 오솔길로 ‘가보고 싶은 대한민국 트레킹코스 전국 1위’를 차지한 곳이기도 합니다.

이곳은 풍광과 경치가 뛰어나고, 오르막 내리막이 별로 없는 평탄한 코스로 가을날 아름다운 정취를 가득 만끽하실수가 있습니다.

월정사에서 상원사까지 9.5km 선재길....

오대천을 따라 걷는 숲길은 1960년대 도로가 나기 전부터 스님과 신도들이 오가며 명상에 잠기던 길입니다.

 

 

 

 

 

 

 

 

 

월정사를 벗어나면 옛 화전민 밭이 나오고, 오대천을 따라 걸으면 월정사 부도밭이 나타납니다.

부도밭을 이곳에 만든 이유는 부족함을 채워주는 비보풍수로, 옛 월정사 고승대덕들의 음덕으로 오대천의 범람을 막아

 월정사가 여름철 홍수에 침수되는 걸 막기 위함입니다. 부도밭은 통과합니다

 

 

 

 

 

 

 

 

 

곧이어 '회사거리'가 나오는데, 이곳은 일제시대 오대산에서 벌목한 나무를 가공하던 목재회사가 있던 곳입니다.

이곳에서 협궤열차를 이용해 가공한 목재를 실어 날랐는데 당시 화전민과 벌목꾼들까지 300여명이 넘는 사람들이 살았다고 합니다

 

 

 

선재길을 걸으면 '보메기'란 지명이 나옵니다. 보메기는 '보막이'의 사투리로, 계곡 물을 보로 막아 나무를 쌓은 뒤 비가 올 때 무너뜨려 벌목한 나무들을 이동시킨 물막이골을 일컫는 곳입니다. 울창한 숲 속, 10월 중순 선재길은 온통 울긋불긋 단풍이 오대천을 따라 이어집니다.

 

 

 

오늘 오대산 선재길 트레킹에 참가해준 셰르파들입니다.

속초에 거주하는 김남식셰르파가 아이들때문에 이곳에서 하산한다고 하여 단체사진을 일찍 찍습니다

 

 

 

서대 수정암(옛 염불암) 옆 우통수에서 발원해 남한강으로 흘러드는 오대천은

정선에서 평창강, 영월에서 동강, 충주에서 남한강, 여주에선 여강이 되어 양평 두물머리에서 북한강과 만나 한강을 이룹니다.

서대까지는 발품을 팔아야하기 때문에 생략합니다

 

 

 

1987년 실측 전까진 한강의 발원지는 금대봉 검룡소가 아니라, 오대산 서대 염불암 곁 우통수였습니다.

 

 

 

오대산 화전민터의 흔적들입니다

 

 

 

 

 

 

 

 

 

 

 

 

 

 

 

 

 

 

 

 

 

 

 

 

 

 

 

선재길을 가다보면 이젠 관광상품이 되어버린 섶다리가 나옵니다.

옛날엔 범람이 잦은 오대천에 매년 사라지면 다시 놓곤 했던 임시다리였습니다.

'섶'은 푸른 솔가지나 작은 나뭇가지를 말하지요.

 나룻배를 띄울 수 없는 작은 하천에, 잘 썩지 않는 물푸레나무나 버드나무로 다리 기둥을 세우고,

소나무나 참나무로 다리 상판을 덮어 그 위에 섶과 흙을 다져 어설픈 다릴 만들었습니다.

여름 장마가 시작되면 홍수로 금방 떠내려 가는 바람에 '이별다리'로도 불렸습니다.

 

 

 

 

 

 

 

 

 

 

 

 

 

멋진 오솔길을 따라 걷다보면, 선재길 중간쯤에 쉼터 휴게소 '오대산장'이 나타납니다.

이곳에서 차를 마시거나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휴게소 곁엔 오대산 '멸종위기식물원'도 있습니다.

 

 

 

 

 

 

 

 

 

 

 

 

 

 

 

 

 

 

 

 

 

 

 

 

 

상원사는 신라시대부터 왕실과 관련이 깊은 곳입니다 '삼국유사'에선 상원사를 진여원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705년 세워진 상원사의 원래 이름은 진여원이었으나, 세조 때 중창 후 상원사로 개명됩니다.

신라 효소왕의 두 아들 보천태자와 효명왕자가 이곳에서 수행정진하면서 창건한 절로,

조선 상원사는 불교를 좋아했던 세조 임금과 인연이 각별했던 곳입니다.

 세조 임금의 부스럼병 치료와 목숨을 구해준 고양이 절로도 유명합니다

 

 

 

세조가 피부병을 앓아 이곳 오대천(혹은 우물)에서 목욕할 때 문수동자가 등을 밀어준 얘기는 인구에 널리 회자된 얘깁니다.

당시 세조 임금의 의관을 걸어두었던 '관대걸이'가 상원사 입구에 아직도 놓여져 있습니다.

 

 

 

 

 

 

 

세조는 상원사에서 문수동자를 친견한 후 상원사를 크게 중창할 땅과 재화를 지원했다고 합니다

또 세조가 친히 낙성식에 참석해 불전에 세 번이나 향을 피웠다고 전하지요

 

 

 

세월은 흘러 일제의 협조요청을 거부한 한암스님이 일제의 탄압을 피해 이곳을 찾아오면서 상원사는 침체된 조선불교에 선풍을 일으킵니다.

한암 스님은 한국동란 당시 1.4 후퇴 때 적들의 은신처가 되는 걸 방지하게 위해, 국군들이 상원사에 불을 지르려고 하자

 "나도 같이 죽겠다"며 눕는 바람에 상원사가 방화 위험에서 벗어났다는 얘기는 아직도 인구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상원사는 자장과 세조의 희망대로 현재 문수신앙의 중심지가 됐습니다. 상원사의 법당 역시 문수전입니다.

 

 

 

 

 

 

 

상원사 주법당인 문수전 계단 아랜 '고양이석상'이 있습니다.

문수전에 들어가려는 세조의 곤룡포를 잡아당겨 수미단 아래 숨어 세조의 목을 노린 자객들로부터 세조의 목숨을 지켰다는 고양이들입니다.

 이 고양이들의 공으로 상원사는 '고양이를 잘 보살피고 또 고양이가 죽으면 제사를 지내라'는 목적으로 묘전(고양이 밭)을 하사받지요.

그 후 궁으로 돌아온 세조는 서울 근교 사찰에도 "고양이를 잡아 죽이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명을 내리기도 합니다.

 

 

 

 

 

세조는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금강산을 두 번씩이나 유람합니다.

그 과정에 상원사에도 들리고 양평 두물머리에도 들려, 상원사를 중창하고 운길산 수종사를 창건하기도 했습니다.

혹시 겨울철이 되면 피부건조증으로 가려운 증세가 나타나는 분들은,

상원사 문수전 내 문수동자상(국보 제221호)에게 치유를 간구해 보시기 바랍니다.

 

 

 

 

 

 

 

 

 

 

 

 

 

 

 상원사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동종(국보 제36호)이 있습니다.

신라 성덕왕 24년(725년)에 만든 상원사 동종(국보 제36호, 성덕대왕신종)은

조선 태조 때 안동으로 옮겼다가, 예종 1년(1469년)에 다시 돌아옵니다.

 '삼국유사'엔 "보천태자가 즉위를 거부하고 수행자의 길로 들어서자 어쩔 수 없이 동생 효명왕자가 왕위를 이었고,

 형 보천태자가 수행하는 이곳에 725년 동종(상원사 동종, 성덕대왕신종)을 달아줬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동종은 화성 용주사 범종과 함께 신라 후기의 범종을 대표합니다.

 

 

 

상원사 동종은 조선 태조 때 안동 남문루로 옮겨집니다.

그러다가 세조가 상원사 중건하며 "제일 아름다운 종소릴 가진 동종을 상원사로 옮기라"고 명하면서

 다시 안동 남문루에 걸린 동종이 1469년에 이곳으로 오게 됩니다

동종이 이곳으로 올 때 안동과 쌓은 그 동안의 정을 잊지 못해, 죽령에서 움직이질 않자

동종에서 종유를 하나 떼어내 안동 남문루 아래 묻으니 그제서야 동종이 움직였다는 얘기는 유명합니다.

 그 만큼 옮기기가 쉽지 않았다는 얘길까요?

 

 

 

 

 

 

 

 

 

 

 

 

 

 

 

 

 

 

 

 

 

*글은 역사문화탐방 셰르파님의 해설을 참조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