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왕릉 탐방기 02 (선정릉 편)
왕의 곁으로 가다....
신들의 정원....
유네스코 세계유산....
서울 지하철 2호선 선릉역과 9호선 선정릉역이 있다는 건 알고 있어도 역 이름이 조선 제9대 임금인 성종과 정현왕후의 ‘선릉(宣陵)’과 아들 11대 중종의 ‘정릉(靖陵)’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것입니다.
빌딩 숲 속 오아시스처럼 강남구 삼성동에 자리한 삼릉공원 안에 자리잡은 '선정릉(宣靖陵)'은 이 지역 직장인들에게 유적지보다는 점심식사 후 커피한잔 빼들고 산책하는 휴식장소로 더욱 잘 알려져 있지요
성종은 1457년 의경세자(뒷날 덕종으로 추존)와 소혜왕후(인수대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나 두 달도 안되어 아버지 의경세자가 죽는 바람에 성종은 할아버지인 세조의 손에 의해 키워졌지요. 세조의 사랑을 한 몸에 받던 성종은 세조 7년(1461) 다섯 살이 되던 해에 자산군에 봉해졌고, 1467년에는 한명회의 딸(뒷날의 공혜왕후)과 가례를 올립니다.
세조 14년(1468)에는 자을산군으로 다시 봉해지고 이듬해 11월 숙부인 예종이 승하하면서 13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지요. 그 후 7년 동안 세조의 비 정희왕후의 섭정을 받았지만 권신과 사림세력을 조화롭게 운용하여 국가권력의 균형을 이루었으며, 유교사상을 더욱 정착시켜 왕도정치의 기초를 완성함으로써 조선 개국 이래 가장 평화로운 시대를 열었습니다.
세조 때부터 편찬해오던 ‘경국대전’ 이 1485년에 완성되었고 동국여지승람 등 다양한 서적이 출판되기도 했지요. 이런 성종이었지만 장수까지 누리지는 못해 1494년 창덕궁 대조전에서 재위25년에 38세로 승하했으며 정비 공혜왕후를 비롯해 12명의 부인과 16남 12녀의 자녀를 두었습니다
성종의 제2계비 ‘정현왕후 윤씨’는 정비인 공혜왕후 한씨, 폐비 윤씨(연산군의 생모)에 이은 성종의 세번째 부인이자 중종의 생모이지요.
성종 4년 숙의에 봉해졌으며, 1479년 윤씨가 폐출되면서 이듬해 왕비에 책봉되었고 소생으로는 중종과 신숙공주가 있습니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을 폐위하고 아들 진성대군(중종)의 즉위를 허락했고 68세를 일기로 경복궁에서 승하하여 성종의 동쪽에 묻혔습니다
선릉은 정자각에서 보면 왼쪽이 성종 오른쪽이 정현왕후능으로 서로 다른 언덕에 능침을 조성한 ‘동원이강릉’입니다. 그 덕분에 능침 사이로 울창한 송림이 우거져 있어 산책하기에 좋고 왕릉중에서 지금의 서울을 가장 가까운곳에서 보고 있을것입니다
‘정릉(靖陵)’은 중종의 단릉입니다. 성종과 정현왕후의 아들로 태어나 1494년 진성대군에 봉해지고 1506년 연산군을 폐위한 중종반정으로 왕위에 올라 연산군대의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고 조광조 등 사람을 중용하여 새로운 왕도종치를 구현하다가 재위 39년(1544년) 57세로 승하합니다.
중종은 원래 1499년 진성대군의 신분으로 신수근의 딸 단경왕후와 혼인했으나 연산군의 비 신씨의 외질녀라는 이유로 반정을 주도했던 공신들의 압력이 가해지자 7일만에 폐위시키고 사가로 쫓겨난 단경왕후는 인왕산 치마바위에 다홍치마를 펼쳐놓고 중종을 그리워했다고 하지요
중종은 장경왕후 윤씨(인종의 생모), 문정왕후 윤씨(명종의 생모) 등 두 명의 왕후와 7명의 후궁을 두어 9남 11녀의 자녀를 두었습니다
원래 중종은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에 두 번째 왕비인 장경왕후의 희릉 옆에 묻여 정릉으로 불렀으나 세번째 왕비 문정왕후에 의해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습니다. 원당리의 풍수지리가 좋지 않아 옮긴 것인데, 정릉 또한 매년 여름이면 재실과 능이 침수되어 피해를 입게 됩니다.
결국, 중종과 함께 묻히기를 바랐던 문정왕후는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현재 태릉(泰陵)에 홀로 안장되어 있지요. 한 여인의 과욕으로 왕과 왕후들이 각각 외롭게 영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참고로 북한산에 있는 ‘정릉(貞陵)’은 한자가 다르며 조선 태조의 두 번째 계비 신덕왕후의 능으로, 조선왕조 최초의 왕비의 능입니다. 원래 중구 정동, 지금의 영국대사관 자리에 있던 것을 태종이 왕에 오르면서 1409년 국민대 근처 정릉으로 이전했는데 ‘정동’이란 이름도 그 때 정릉이 그곳에 있었기에 붙여진 것이지요.
태종은 신덕왕후를 태조의 왕비로 인정하지 않고 정릉으로 옮기면서 남은 목재와 석재는 태평관과 청계천 광통교 복구에 사용해버립니다
선릉과 정릉은 안타깝게도 임진왜란 때 파헤쳐지고 재궁이 전부 불타 버렸으나 현재까지도 도심 한가운데에 보존되고 있으며 사적 제199호로 지정되었고 2009년 6월 30일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선정릉 재실 앞의 은행나무는 수령 500년이상 된 것으로 선정릉의 역사와 함께 하고 있으며 인근 테헤란로의 원래 이름도 선정릉에 봉분 세 개가 있다는 것에 착안한 '삼릉로'(三陵路)였지요
2020.10.23 풍경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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