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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킹/조선왕릉탐방

조선시대 왕릉 탐방기 05 (융건릉 편)

by 풍경감각 2020. 12. 27.

조선시대 왕릉 탐방기 05 (융건릉 편) 
 
왕의 곁으로 가다....
신들의 정원....
유네스코 세계유산. 
 
화성 화산(花山)에 있는 '융건릉(隆健陵)'은 사도세자와 혜경궁홍씨의 '융릉'과 정조와 효의왕후의 '건릉'을 합쳐서 부르는 이름입니다. 화산은 예로부터 풍수지리상 용의 여의주를 희롱하는 ‘반룡농주(盤龍弄珠)' 형국인 천하명당으로 잘 알려진 곳이지요 
 
1789년 사도세자의 무덤을 지금의 서울시립대 배봉산 자락 영우원에서 수원도호부 읍치로 옮기면서 그 곳에 있던 관청과 200여호의 민가에 보상금을 주고 팔달산 동쪽 넓은 들판으로 이주하도록 했는데 지금은 수원의 중심부가 되었지요 
 
정조는 1793년 1월에 수원도호부를 화성유수부(華城留守府)로 승격을 시키면서 도시 이름도 아예 '화성(華城)'으로 바꿉니다. 
 
화성은 정조가 특별히 지은 이름으로 ‘화(華)’라는 말에는 부(富), 수(壽), 다남자(多男子)가 담겨있기를 기원하는 뜻이라고 합니다. 즉 화성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부자가 되고, 건강하게 오래 살고, 인구가 번성하여 큰 도시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고 하더군요 
 
역사문화해설은 들으면 들을수록 재미가 있고 특히 야사를 곁들이면 더욱 흥미롭고 행여나 한마디라도 놓칠세라 귀를 쫑긋 세우기도 하지요^^...ㅎㅎ 
 
영조는 첫번째 아들인 효장세자가 10살때 세상을 떠나자 세손이었던 정조를 큰아버지의 양자로 입적시켜 왕실의 족보를 수정하지요. 공식적으로는 효장세자가 정조의 아버지이고 사도세자는 생부(生父)가 될 뿐입니다. 그래서 정조는 즉위 첫날 자신의 공식적인 아버지인 효장세자를 진종(眞宗)으로 추존하여 자신의 정통성을 확립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도세자에 대한 애끓는 사부곡이 있었기에 국왕으로 추존하고 싶었지만 할아버지 영조와 노론의 반대로 장헌세자로 추존하는데 그치고 아버지의 묘소를 조선 땅에서 가장 좋은 명당으로 옮겨 주자고 굳게 결심하고 화산을 선택하게 되지요 
 
융건릉 재실에는 처음 들어가봤는데 산수유와 앵두나무 그리고 천연기념물 504호로 지정된 '개비자나무'가 있더군요 
 
정조는 현륭원에 나무를 많이 심고 여러차례 행차를 하였는데 어느날 소나무를 갉아먹는 송충이를 보자마자 감히 네가 아버지 무덤에 심은 나무를...하면서 송충이를 입으로 씹었다고 하는데 그 이후로 융릉에는 송충이가 없어졌다고 하더군요^^...ㅎㅎ 
 
왕릉은 보통 금천교를 지나면 홍살문이 있고 향로와 어로가 있고 수라간과 비각 그리고 정자각 뒤로 능침이 일직선으로 배치됩니만 융릉은 능침 방향을 틀어 앞이 훤히 보이도록 배치하였습니다 
 
그 무덥던날 뒤주에 갖혀 죽은 사도세자가 저 세상에서라도 갑갑하지 않도록 배려한 정조의 애절한 효심을 가늠할수 있는 대목이지요 
 
또한 사도세자를 왕으로 생각하고 왕은 곧 용이기 때문에 남서방향에  '곤신지'라는 둥근 연못을 만들게 됩니다. 여의주를 용이 가지고 놀수 있도록 했는데 이곳은 생방 즉 풍수지리상 능침에서 첫번째 만나는 물이라고 하더군요 
 
건릉은 정조의 능으로 원래 아버지 곁에 묻히기를 원하여 헌륭원 왼쪽에 초장지가 있었으나 자리가 좋지 않다고 하여 지금의 자리로 천장을 했는데 오늘은 초장지 가는길을 개방해 놓았더군요 
 
용주사와 융건릉 그리고 수원화성과 화성행궁을 연결하여 역사문화해설을 듣고 천천히 탐방해보면 효행은 물론 정조시대의 모든것을 알수 있을것입니다 
 
2020.12월 어느날 풍경소리 

 

▼융건릉 재실

▼ 천연기념물 제504호 개비자나무

▼금천교

▼곤신지

▼수라간

▼비각

▼건릉으로 가는 숲길

▼건릉입구